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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Aug 01. 2022

내 오래된 밥솥

밥솥 요리

 

부추를 다져 넣은 된장과 쌈채소

 땡볕과 소낙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산골 밥상은 단출하다. 풋고추와 상추를 따다 된장 놓고 먹거나 채소 구이를 해서 먹는다. 상추는 끝물이고, 풋고추는 한창이다. 아침마다 고추 한 줌씩 따서 그날로 다 먹는다. 애호박과 가지는 이삼일에 하나 정도 따서 굽거나 볶아 먹는다.        


  가스 불 앞에 서 있기 싫은 계절, 웬만한 음식은 전기밥솥에 한다. 채소 구이도 마찬가지다. 요리 과정이랄 것도 없지만 소개한다. 양파와 애호박, 꽈리고추를 먹기 좋게 잘라 전기밥솥 바닥에 깐다. 그 뒤 식용유를 조금 친 뒤 가열 버튼을 누르면 완료다. 전기밥솥마다 조리 버튼이 다양할 것이다. 내 전기밥솥도 국 요리, 볶음, 해동, 스팀, 죽 같은 여러 메뉴 버튼 있고, 식감과 압력 강도도 취사선택할 수 있게 아주 복잡하다. 다른 건 곁눈질하지 않는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버튼은 재가열버튼이다. 스팀이 오른 뒤 10분 정도 가열되다 보온으로 넘어가는 기능인데, 보통 나는 5분도 되지 않아 취소 버튼을 눌러 조리를 끝낸다. 뚜껑은 성급히 열지 않는다. 남은 열기에 채소가 좀 더 부드럽게 익을 동안 접시를 꺼내고 곁들여 먹을 김치 따위를 준비한다. 이제 솥뚜껑을 열 소금 톡톡 뿌린 뒤 구운 채소를 꺼내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다. 요리 비법이 있다면 양파다. 양파가 기름에 노하게 구워지며 나온 국물이 소금을 만나 조미료 역할을 한다. 밥은 한꺼번에 해서 며칠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 편이라 찬밥일 경우가 많데, 럴 땐 채소 덜어 낸 밥솥에 넣고 잠시 볶아. 재가열 버튼을 다시 눌러  2분 정도면 적당하다. 남아 있는 채소 국물과 기름기가 배여 맛있어진다. 가끔 색다른 밥을 원할  강황가루를 반 작은 술 넣어 강황밥을 만들기도 한다.


강황밥과 채소구이



  이번 글은 사실 음식보단 밥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기만 해도 구수한 밥 냄새 나는, 내 부엌 오래된 스테인리스 풍년 압력밥솥 대해. 년 밥솥은 부모 품을 벗어나 분가하던 1989년엄마가 사 준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34년 동안 내게 밥을 해 준 밥솥이다. 삼중 바닥에 질 좋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졌는지 어떤지모르겠지만, 앞으로도 30년 넘게 거뜬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뚜껑 부분 압력장치와 고무 패킹도 교환한 적 없이 아직까지 멀쩡하다. 엄마가 오시면 그 밥솥에 밥을 해 밥상을 차려드렸다. 엄마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내 집에 와서 이삼일 가량 묵어 가셨다. 그때마다 내 부엌에서 당신이 사 준 밥솥을 반갑게 해했다.

 어머, 너 아직 이걸 쓰는구나!” 


34년 전 엄마가 사준 압력밥솥

 

 세월이 제법 흐른 어느 날엔,

얘 요즘 전기압력밥솥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아직도 이걸 쓰니.”

  밥솥을 보며 말했다. 밥솥이 서운해할 것 같아 귀를 막아 주고 싶었다. 그날 엄마는 전기밥솥을 사라고 10만 원을 주고 갔다. 그 돈으로 뭘 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밥솥은 사지 않았다. 세월이 좀 더 흐른 뒤 또 엄마는, 

  , 전기밥솥 하나 사라. 좋은 거 많아.”

  밥솥에서 밥을 푸고 있는 내게 말했다.

  뭐 하러. 이것도 얼마나 밥이 잘 되는데.”

  나는 말했다. 밥솥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어디에서도 나는 내 밥솥이 해 주는 밥만큼 찰지고 구수한 밥을 먹어보질 못했다. 콩밥, 팥밥, 보리밥, 흑미밥, 귀리밥, 렌틸콩밥, 잡곡밥, 감자밥, 무밥, 콩나물밥 . 콩나물밥 같은 건 약간 요령이 필요하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뚜껑만 얹어 우선 밥을 끓인 뒤, 뜸 들이는 과정에서 콩나물을 넣고 뚜껑을 제대로 닫아 잠시만 더 가열하면, 밥은 고슬고슬 콩나물은 아삭한 상태로 만들어졌다.

  가스 불 켜고 밥 하는 거 힘들잖아. 편리한 게 좋지.”

  그날 엄마는 또 전기밥솥 살 돈을 내게 주었다. 수년 전 같은 용도로 돈을 준 적 있다는 까맣게 잊은 눈치였다. 오래된 밥솥 덕분에 두 번이나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돈으로 남이섬 여행을 다녀왔다. 일명 밥솥여행이라고 불 여행.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 섬 둘레 름다운 갈대숲 길 실컷 걸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엄마도 새 밥솥 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된 내 밥솥으로 계속 밥을 해 먹고살았다. 도시를 떠나 산골에 온 뒤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엔 가스불이 아닌 장작난로에 솥을 얹어 두기도 했다. 압력추가 요란하게 돌지 않는 대신 천천히  들어,  고소하고 도톰한 누룽지도 맛볼 수 있었다. 래도록 함께 하고 싶어 나도 나름 정성을 들였다. 사용 후엔 반드시 고무패킹을 꺼내 잘 말고, 난로얹을 땐 손잡이가 려되어 젖은 행주로 감싸 놓기도 다. 이심전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서로 통하는 게 있고까지 느꼈다. 그렇게 내 평생 유일한 밥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봄, 나는 전기압력밥솥을 구입했다.       


  불가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과 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는 것. 그러니까 랜 인연도 때가 되면 헤어지게 되고, 각지 못한 로운 인연도 가 되 다가오게 된다는 말이다. 올봄 내 부엌에 그러한 인과의 법칙이 발생했다. 1,2리터 용량 전기포트가 수명을 다했던 것이다.


  기포트도 오래 사용하던 것이었다. 도시 아파트에서 쓰던 것을 산골에 와서 또  9년을 넘겼으니, 적어도 10 이상은 되었다. 루에도 몇 번이나 따뜻한 물을 손쉽게 마실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물건었다. 물도 빨리 끓고 크기도 적당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이라 다루기도 편했다. 수위를 볼 수 있는 내열유리가 장착되어 물이 끓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무 일찍 잠에서 깬 막막한 새벽엔, 물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늑해졌다. 그런데 지난봄 제법 쌀쌀했던 새벽, 물이 끓다 말고 전원이 슬며시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버튼을 다시 눌러보았다. 달칵, 눌러지나 불은 켜지지 않았다. 전원 버튼 붉은빛이 사라진 부엌은 일순 너무나 적막했다.


  한동안 냄비에 물을 받아 야 했다. 냄비 물을 부어 따뜻한 물과 차도 마시고, 냄비를 기울여 핸드드립 커피도 내렸다. 오래 정든 물건을 잃고 자못  했지만, 애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냄비를 기울여 내리는 커피는 어쩐지 보리차 맛이 났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는 온라인 쇼핑몰을 두루 다니며 온갖 전기포트를 만나보기 시작했다. 원하는 사이즈와 모양, 가격대에 맞춰 몇 개 모델을 추린 뒤, 이틀 정도 고심하여 물품 하나를 골랐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인연이 생겼으니, 전기압력밥솥이었다. 전기압력밥솥은 스테인리스 전기포를 찾는 과정에 입력한  스테인리스가 매개되어 내게 다가온 인연이었다.


   그동안 내가 전기압력밥솥에 관심을 갖지 않은 건, 내부 솥이 거의 코팅 제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람도 사물도 믿음직하고 편해야 곁에 두고 싶은 것이다. 코팅된 밥솥은 조심스러운 데다 미덥지도 않았다. 그런데 온라인 쇼핑몰에서 떡하니 눈에 띈 스테인리스 전기밥솥. 일단 반가워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밥솥이라기보다는 멀티쿠커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제품이었다. 내부 솥이 스테인리스인 것도 그렇고, 뚜껑이 분리되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혹했다. 밥은 물론 국물 요리, 볶음 요리, 찜  요리, 죽 요리 등이 가능했다. 나는 그만 그것이 마음에 들고 말았다. 그러자 가스레인지에서 음식을 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가 떠올랐다. 사실 고역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전기쿠커는 시끄러운 주방 후드를 틀지 않고도 음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기포트를 주문하기까지 이틀이나 신경 쓴 직후라 더 이상 망설이기엔 힘이 렸다. 과감히 주문. 그리하여 전기포트와 함께 내 부엌에 입성한 전기압력밥솥. 덩치가 커서 잠시 서먹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밥맛이 의외로 좋았고 조리 과정도 빨랐다. 사용법을 익히자 점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국수도 감자도 콩도 삶았다. 약초도 진하게 우릴 수 있었다. 조용하게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장점이었다. 웬만한 음식은 이제 다 전기밥솥 하고 있다.    


텃밭 작물
전기밥솥에 찐 애호박, 당근, 고추, 양파

   텃밭에서 당근을 뽑고 가지와 애호박을 따온다. 날이 더워도 요리가 부담스럽지 않다. 커다란 전기밥솥에 툭툭 잘라 넣고 재가열 버튼만 누르면 5분 만에 완성인 것이다.


  오래된 내 풍년 밥솥은 조리대 아래 선반에 잘 모셔두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쾌적한 휴식을 위해 보송한 수건도 깔아 주었다. 때깔 좋은 신품 밥솥이 아무리 신통하다지만, 풍년 밥솥과 함께 해온 그 기나긴 세월의 밥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살아오면서 먹은 무수히 많은 , 그와 함께 지나간 무수히 많은 나날. 모두와 함께 오늘 고마운 하루가 구수하게 익어간다. 올여름도 이내 지나갈 것이다. 어느새 찬바람 불고 눈도 나리겠지. 삼복더위에 떠올리는 눈은 선명하기도 한데, 막상 겨울 어느 하루, 눈앞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 볼 때면 믿을 수 없는 기분이 . 그렇게 거짓말처럼 창 너머 가만가만 눈이 내리는 날, 붉게 지핀 장작난로 위 정다운 밥솥이 아담하게 놓여 .     

 




올봄 구입한 전기압력밥솥과 34년 된 풍년압력밥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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