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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Dec 29. 2023

연말 파티엔 역시 떡볶이지

도깨비와 함께한 연말

  기상예보엔 눈이 올 거라고 했는데 아침 6, 눈이 과연 내리는지 알 수 없게 밖은 아직 어두웠다. 무슨 소리일까 귀를 기울이게 하는 수상쩍은 기척만이 집을 에워싸며 들려왔다. 바람 소리인 걸 모르지 않지만, 어둠 속을 내달리는 바람은 늘 생경하고 기괴하다. 벽체와 지붕이 없다면 기이한 산중에 덜렁 있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이웃이 있다 해도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걸어서  분이다. 보안등도 없는 마을의 어둠 속  분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이곳에서 동생과 둘이서 십 년을 지냈다. 십 년 또한 결코 짧지 않다. 그런데 이상도 하다. 왜 엊그제인 듯 느껴질까. 문을 열고 이쪽 공간으로 잠시 건너와 있는 기분이다. 시간은 공간과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물리학에서는 설명한다. 밤과 낮, 삶과 죽음처럼. 138억 년 전 시간과 공간이 처음 생겼다는데, 그런 알 길 없는 이론들이 밤의 어둠에서는 바람 소리처럼 기괴하기만 하다. 그럴 마음은 없지만 다시 문 하나만 지나면 내가 왔던 저쪽 공간만이 아닌, 더 먼 낯선 세계로도 건너갈 수 있을 것 같다.  

   

  상상할 수 없다면 물리적 추론도 가능치 않을 것이다. 우주도 모르고 시공간도 떠올릴 수 없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 요구만을 해결하며 오늘내일의 구분도, 삶과 죽음의 고민도 없이 살 수 있겠지. 상상은 인간의 삶에서 빅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된다. 신앙, 예술, 희망, 절망.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94분의 3 승강장도, 문짝만 열면 한걸음에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도깨비도.  

   

  요즘 도깨비에 빠져 있다. 방영한 지 좀 된 텔레비전 드라마인 '쓸쓸하고 찬란한 신 도깨비'. 판타지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와 감동으로 한때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도깨비를 그래서 당시엔 관심 두지 않았다. 하지만 판타지를 피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온라인과 실제도 분간하기 무색해졌다. 얼마 전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무빙'을 첫 회 보다가 중단했다. 피가 너무 많았다. 피 흘리는 광경을 심하게 못 보는 사람이다. 어릴 때 학교에서 줄 서서 예방 주사를 맞으려다 기절한 적도 있다. 도깨비는 무서운 혼령들을 외면하며 첫 회를 넘기자, 왜 이제 보았나 현실을 잊게 했다. 아니 현실로 여기고 싶어졌다. 인간 모르게 인간을 돕는 삼신할미와 도깨비가 있는 세상이라니. 게다가 이승을 잊고 갈 수 있도록 차 한 잔 권하는 정중한 저승사자까지. 이제 비나 눈이 오거나 이상기후 현상일 때면 아, 도깨비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 기후  위기 걱정보다는 그 편이 내 하루에 도움이 된다.     

 

크리스마스 날 숲냥이 밥 주러 가는 중. 빗자루 든 뒷모습이 어째 도깨비를 닮았다.


  올해도 연말이 다가오자 동생이 고양이들과 테라스에 트리 장식을 했다. 테라스는 고양이들 영역이라  구 한다. 반짝반짝 불빛이 고양이들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하얀 눈이 쌓인 마당을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불빛이 엔딩곡처럼 흘렀다. 마무리엔 불빛이 필요하다. 올 한 해 일상의 기쁨과 슬픔, , 충만, 평안, 공허를 반짝이며 섞어준다. 어느 하루도 나쁘지 않았다고. 모두 신비로웠다고.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라고 도깨비도 말하지 않았던가. 크리스마스엔 눈이 내렸다. 이따금 먹구름 사이로 볕이 나서 눈도 반짝반짝, 집안엔 장작불이 타닥타닥.

  "크리스마스엔 역시 불멍이지."

  난롯가 의자에 앉은 동생이 말했다.

  "크리스마스엔 역시 눈멍이지."

  창가에서 차를 마시며 내가 말했다.


  2023년 이제 마 남지 않았다.  어제 테라스에서 동생과 고양이들과 산골 연말 파티를 했다. 고양이들을 위해 동생이 노가리를 고, 나와 함께 먹을 떡볶이도 만들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며칠 저온 숙성시킨 반죽으로 겨울빵을 구웠다. 감자와 양파, 당근, 버섯, 치즈가 듬뿍 들어간다. 고소한 겨울빵과 매운 떡볶이는 산골 연말 파티 고정 메뉴다.

  "연말 파티엔 역시 겨울빵이지."

  하얀 치즈가 쭉 늘어나는 빵을 포크로 떠서 먹으며 동생이 말했다.

  "연말 파티엔 역시 떡볶이지."

  매운 냄새가 훅 올라오는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내가 말했다. 어찌나 매운지 기침이 큼큼 올라오는 걸 참았더니 웃음이 났다. 산 너머로 지는 해가 테라스 장식 전구 마지막 빛을 건네주었다. 어떤 트릭도 없이 어둠은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공기는 싸늘해지고 숲은 수상해졌다. 노가리에 저녁밥까지 배불리 먹은 고양이들은 하나 둘 스티로폼 집으로 러 갔다.

  "밖에 뭐가 있니?"

  고양이 보리에게 동생이 물었다. 보리는 라스 귀퉁이에 끝까지 남아 당가 벼랑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리는 방랑 고양이다. 한 번 마당을 벗어나면 어딜 얼마나 헤매다 오는지 며칠 외박은 보통이다. 최장 한 달이 넘어 돌아온 적도 있다. 세상 꾀죄죄한 몰로 나타나 괜스레 힐끔대며 밥을 먹고는 한잠 늘어지게 자는 꼴이라니. 춥고 눈 많은 겨울엔 한시적으로 캣도어를 잠가 출입을 통제하기에, 꼼짝  하고 테라스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다.

  "도깨비가 온 거 아닐까."

  테라스 투명 벽체가 아니라면 곧 튀어 나갈 태세인 보리를 보며 내가 말했다. 바짝 귀를 세우고 꼬리털까지 잔뜩 부풀린 것이 무엇인가 감지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됐고, 떡볶이나 더 먹어."

  동생이 떡볶이 냄비를 끌어다 내 그릇에 한 국자 더 담아 주었다. 도깨비조차 울고 갈 매운 떡볶이.

  "안녕."

  큭큭 기침을 하며 나는 말했다. 이제 나도 고양이들처럼 내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동생이 물었다.

  "누구한테 하는 안녕이야?"

  내가 말했다.

  "양쪽 모두에게. 가고 있는 것들, 오고 있는 것들."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가 한 말.




올해도 잘 지냈습니다. 산골 연말 파티


떡볶이와 겨울빵


집순이 어미 율무와 방랑 딸내미 보리(오른쪽)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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