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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Nov 30. 2023

겨울 온기

서쪽 친구

  서쪽 친구에게서 택배가 왔다. 내용물은 보온용품. 도톰하고 목이 긴 양말 네 켤레, 몽실한 인조 양털로 속을 댄 덧버선이 두 켤레, 내복처럼 몸에 착 붙는 쫀쫀하고 폭삭한 면티는 무려 다섯 장이나 되었다. 반목폴라로 흰색, 검은색, 먹색, 미색, 적갈색. 모두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었다. 조한 겨울철 피부를 매끈하게 해 줄 수분크림과 곧 다가올 연말 기분을 낼 수 있는 크리스마스 그림 커튼도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온기가 느껴지는 다정한 물품들.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하자니 마음에 따뜻한 스팀이 감는 것 같았다. 겨울 초입부터 몇 차례 강추위가 닥친 산골이지만 올겨울은 포근할 것이다.  

        

  '서쪽'은 친구의 웹 아이디. 지리상으로도 내가 사는 곳 서쪽 방향에 살고 있다. 차를 타고 가면 세 시간 정도 걸릴 수도권 아파트. 얼굴 본 지 수년이 지났지만 전화 통화는 간간이 하는 편이다. 인연을 이어온 지는 이십 년이 넘었다. 친구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울 교 어느 대학앞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구는 내 가게에 온 손님이었다. 치마를 입고 머리에 인도풍의 모자를 썼던가. 독특한 취향을 지닌 이의 멋스러움 같은 게 몸에 밴 모습. 첫 만남부터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던 건 잠시 뒤 그녀의 맨발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커피 마실 수 있나요?"

  카페 문이 열리고 친구가 낯선 얼굴로 었을 때 는 산에 약수를 뜨러 가려던 참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대학은 그때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었고 손님 대부분이 대학생들인 만큼 한가한 아침이었다. 학 정문을 통과해 샛길로 빠지면 산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끝에 작은 절이 있었다. 상주하는 스님은 없고 보살이 지키고 있던 절인데 그 입구 바위샘에서 약수가 솟았다. 가게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외출을 늦추고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졌다. 이상하게도 우연히 들린 낯선 손님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던 이가 찾아온 듯 여겨졌다. 원두피를 내려 나눠 마신 뒤 우리는 곧 약수통을 들고 함께 카페를 나서게 되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과 약수를 뜨러 가는 일이 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로선 자연스러운 진행이었다. 학교 샛길을 벗어나 호젓한 산길에 이르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연 신발과 양말을 벗어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녀가 그때 무슨 말인가를 했다면 길이 예뻐서 맨발로 걷고 싶어요.’ 라기보다는 맨발로 흙을 디디면 지구의 한 부분인 것이 느껴져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말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해도 춤이라도 추듯 가뿐히 푸른 숲을 가르고 가 하얀 맨발의 그녀는 인상에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이 하루도 중단할 수 없는 조용한 전투라면 오랜 세월 동시대를 살며 서로의 삶을 지켜보 안부를 나눈 친구란 전우 같기도 하다. 주 만날 수 없다 해도  무사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의식 아래 기도처럼 흐른다. 선물이 도착한 뒤 서쪽 친구와 통화를 했다. 고맙다는 내 인사에, 주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는 그 마음이 귀하고 고맙다고 친구는 말했다.

 "요즘 시대에 물건이 뭐 귀한가. 정말 귀한 거는 모두 공짜야. 마음도 그렇고 공기, 바람, 햇볕 같은 거." 

  친구다운 답변이었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산골의 한정된 시야가 확장되고 시간의 경계도 사라진다. 도시의 번화가와 수많은 인파가 그려지는가 하면 지나온 시절의 한 대목으로 훌쩍 넘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기억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라 같은 일화를 전혀 다르게 떠올리는 것에 웃게 된다. 시선의 방향이 나와는 다른 친구라 기억의 선택도 다르다. 내겐 없는 어느 순간을 친구는 숨소리조차 섬세히 살려낼 정도로 기억해 기도 한다. 때로 그녀를 통해 듣는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마치 여러 사람이야기 전해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제는 아침부터 눈이 조금씩 흩날렸다. 아주 가벼운 눈발이었다. 먹구름 사이 볕이 흘러나올 때면 빛의 입자처럼 반짝거리며 날아다녔다. 그쳤는가 싶어 가만 보고 있으면 다시 하얀 입자들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 이따금 흩날리는 눈을 보며 숲 사이 농로를 걷다 돌아왔다. 갈빛 억새숲에선 작은 새들이 눈송이처럼 폴폴 날아올랐다. 푸른 기운이 있던 하늘은 차츰 온전한 무채색으로 채워졌다. 해거름 녘에 눈은 좀 더 부풀어 사물의 윤곽을 하얗게 그려내다가 이내 어둠에 묻혀갔다. 잠들기 전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새벽 눈밭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썸네일을 보았다. 제목은 '얼음의 온도'*. 같은 제목의 시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며 클릭을 했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기요 깔린 이불속에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음이 귀에 익었다. 오래된 프랑스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 아, 그런데 피아노 음률은 이제 막 태어난 듯 로운 감동을 주었다. 확인해 보니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였다. 소리가 소리를 잠재우듯 세상은 피아노 소리로 점점 고요해. 창 밖 어둠 속엔 여전히 눈이 내릴까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깨어난 아침, 창 밖은 하얗다. 밤새 내린 것 같지는 않았다. 부피 없이 채색된 흰빛이 영하 10도 아래 냉기에 멈춰 있었다. 분간 추위가 이어진다는 상 예보다. 눈은 차갑 겨울날의 온기이기도 하다. 눈이 내리고 내려 온통 하얀 세상이 되면 잠시 우리 마음은 이글루처럼 포근하기도 할 것이니.    


* 허연 詩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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