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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Jan 10. 2024

눈사람

   산골 겨울의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역시 눈이 내릴 때 찾아온다. 묵직한 먹색이 하늘을 틈 없이 메우고, 새들이 마른 덤불 사이로 유난히 몰려다니다 갑자기 고요해지는 때. 지휘자가 지휘봉을 높이 쳐든 순간의 정적 같은. 이윽고 지휘봉이 허공을 탁 그으면 장막이 열린다. 하얗게 맺혀 피어나는 수만 송이가 사뿐사뿐 허공을 딛고 가볍게 떠다니는 광경. 팝콘이 튀겨지듯 혹은 묵은 가지에서 봄꽃이 일제히 피듯, 매혹의 한순간.

 

  매혹은 그렇게 순간에만 찾아온다. 그리고 대가가 따른다. 눈이 내릴 때마다 홀린 듯 바라보았다 해도 곧 기다리고 있을 중노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이 내리면 집 마당에서 우물까지 100여 미터 내리막길과, 우물에서 마을 도로까지 150여 미터 오르막길, 해서 모두 250여 미터 경길에 덮인 눈을 치워야 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리 추운 날도 눈삽을 들고 나서면 이내 몸에 열기가 오른다. 겉옷을 벗어부치고 또 눈을 얼마간 치우다 보면 모자며 팔토씨도 벗어 놓게 된다. 얼어붙은 눈덩이가 시원하게 느껴지고, 눈꽃 빙수라도 한 사발 만들어 먹고 싶어 진다. 허리를 펴고 휘휘 돌리다 고개를 젖히면, 갈대숲 위 하늘은 왜 그리 깨끔한 건지. 흰 눈에 씻긴 하늘이라서인가 싶지만, 기분이 그런 것이다. 힘들어도 기분 좋은 노동이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지만 흰빛이 주는 매력은 기운이 소진한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늘어진 나뭇가지에서 하얗게 이는 눈보라, 멀리 떠나온 것같이 낯설어 보이는 가까운 산의 흰 능선들. 아름다움에 잠시 기운을 얻었으니 또 계속 나아간다. 하얀색이라 가뿐해 보이지만 눈은 무겁다. 퍽퍽 퍼 올리던 것이 점차 시늉으로 바뀌다 결국 ', 더 이상은 못해' 하는 순간이 온다. 동생은 저만치에서 계속 눈을 치우며 오고 있다. 다섯 살 아래 동생보다 늘 내가 먼저 지친다. 과연 나이가 무서운 건가.  

        

  눈삽을 던져놓고 앉아 눈을 뭉친다. 도구에서 벗어난 홀가분하고 열기 오른 손바닥에 차가운 눈이 상쾌하다. 하나를 뭉쳐놓고 또 하나를 뭉친다. 어느 결에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거다. 모래펄이었다면 두꺼비집이라도 짓고 있겠지. 왜 인간은 먹고사는 일 말고도 온갖 딴짓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 외의 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활동 말고는 다른 짓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거나 리듬을 타거나 눈사람을 만들지도 않겠지. 창조가 인간 본성에 있는 것이라면 그런 딴짓이 인간에겐 생존의 한 요소일 수도 있겠다. 에너지의 한계를 느끼고서도 어느새 자그마한 눈사람 하나를 만들며 즐거워하니 말이다.   

       

  " 해?"

  아랑곳없던 동생도 어느새 다가와 들여다본다. 말 한마디 걸지 않고 힐끗 지나칠 땐 '힘든 와중에 뭔 짓거리인가'라고 등짝에 쓰여 있더니만. 관객이 생기니 좀 더 재미가 붙는다. 검정 풀씨로 눈사람 눈을 붙이고 목엔 갈댓잎 목도리도 둘러준다.

   "웃는 얼굴로 해 줘."

  동생이 주문한다.

   "당연하지."

  작은 나뭇가지를 브이 자로 접어 눈사람 입을 붙이자 방긋, 눈사람이 웃는다. 맨머리는 추울 테니까 떡갈나무 잎으로 모자를 씌워준다. 웃는 얼굴에 삐딱한 모자가 유쾌한 인상을 자아낸다. 이로써 '올겨울 눈사람' 완성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게 되는데 어쩐지 하나 이상은 만들게 되지 않는다. 눈사람에게 표정이 생기는 순간 내 속에서도 감정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너 하나면 충분해' 온전히 주는 마음 같은.

 

  마을 길을 걷다 보면 이웃집 마당에도 간혹 눈사람이 보인다. 반장님 댁은 아마도 그 집 아들이 만들었을 커다란 눈사람이 서 있다. 가 훌쩍 큰  것이 반장님을 닮았다. 눈도 입도 삐딱하게 웃고 있어 마주 보며 시크하게 웃어준다. 산마루 가는 길가 버섯농장 댁엔 눈사람 부부를 만들어 놓았다. 남편 눈사람은 하늘색 야구모자를 쓰고 아내 눈사람은 주황색 털모자를 화려하게 썼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누구에게라도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추운 겨울, 눈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그렇게 이웃 간에 따스한 안부를 묻는 분위기가 된다.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에도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연결해 주는 눈사람 올라프가 나온다. 마법의 힘을 지닌 엘사가 그 힘을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왕국을 온통 얼음으로 덮어버리고 떠났을 때, 동생 안나는 언니의 선함을 믿고 끝까지 엘사를 찾아 나선다. 두 자매가 여러 난관 끝에 만나고 겨울왕국에도 다시 봄이 오도록 돕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눈사람 올라프다. 올라프는 두 자매의 어린 시절 함께 만든 눈사람이 엘사의 마법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행복하기만 했던 시절에 태어난 만큼 올라프는 태생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사의 실수로 안나의 심장이 얼어버렸을 때 올라프는 자기 몸이 녹을지라도 장작불을 지피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물론 겨울왕국에서는 마법의 힘이 있으니 끝까지 유쾌하고 행복한 눈사람으로 남아 있다.

      

  겨울왕국이 아니더라도 눈사람의 속성은 따뜻함이다. 엘사와 안나 자매처럼 우리도 눈사람을 만들던 시절이 있고, 추운 겨울이면 불현듯 그 눈사람을 소환해 내는 것이다. 해마다 내가 눈사람을 만든다지만 그러니 그 주체는 내가 아니다. 북극 찬 바람이 사납게 몰아쳐 오는 겨울, 세상이 어두운 눈구름으로 뒤덮이고 모두의 마음에 따뜻함이 필요해지면 그렇게, 눈사람이 온다.   

    



엘사와 안나 같은 자매^^


눈을 치우고 치워도 겨우내 비탈길은 이 모양입니다


올겨울의 눈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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