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금 Sep 15. 2020

당신 곁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가 같이 산을 올랐던가. 눈 쌓인 도로, 헛돌던 바퀴, 매섭던 바람. 잔뜩 날이 선 내가 고르고 골라 아픈 말을 뱉고 이미 한참 전 한계치에 도달한 네가 침묵으로 일관하던 풍경.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을 봤는지는 잊힌 채, 지난 기억은 드라마 한 장면처럼 싹둑 잘려 머릿속을 떠돈다. 

마침내 내가 달리는 차의 문을 열었을 때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저절로 속도가 줄던 차 안에서 나 혼자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는데. 몇 걸음이나 걸은 뒤에야 휴게소를 발견했었는지, 얼마나 기다린 후에야 네가 왔었는지.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날들은 이렇게나 희미하다.


한라산을 향했던 것 같기도, 공항을 향했던 것 같기도 한 그 차 안에서 나는 얼마큼 나빠질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는 아이처럼 굴었다. 나뿐이었을까, 내가 시험하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나를 시험하던 것은.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재발견한다. 나는 때론 생각보다 착하고, 때론 생각보다 나쁘며, 때론 소심하게 미적대고, 때론 미쳤나 싶게 별생각 없이 군다. 그리고 대체로 기대와 다르다. 안타까운 건 다르다는 게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타인에 평가에 무던하다 생각한 스스로가 의례적인 칭찬을 마음에 담아두고 몇 번씩 꺼내 쓰거나 누군가의 무심함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서운해할 때, 나는 그런 내가 좀 귀여웠다. 내 안에도 이렇게나 말랑말랑 달달한 모습이 있구나 싶어 자꾸 돌아보며 대견해했다. 내 안이 나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은 듯해 뿌듯했다.


반대로 타인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생각한 스스로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열과 성을 다해 미워하거나 누군가의 별 거 아닌 말에 하나하나 날을 세울 때, 나는 그런 내가 좀 넌더리 났다. 내 안에도 이렇게나 음습하고 질척이는 모습이 있구나 싶어 자꾸 돌아보며 싫어했다. 못난 내가 나를 다 덮어버린 듯해 실망했다.


뭐가 달랐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 날 그 차 안에서 나는 왜 그렇게 악다구니를 썼던 걸까. 


그를 만나기 전 나는 마구잡이로 화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가 나도 차분히 얘기하려 애썼고, 화가 극한에 치달은 상태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차라리 울었다.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 만큼 무모한 사람도 아니었다. 버킷리스트에는 10년째 번지점프가 적혀있고, 잘못 넘어져 크게 다치는 것이 무서워 스노우 스포츠에는 관심도 안 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안에 불쑥 들어와 그 안을 맴도는 이런저런 나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하나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끄집어내면 끄집어내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는 작은 나들. 누군가는 결국 내가 관계 맺은 상대겠지. 


누구와 관계 맺는지가 중요하다는 모두가 한 번쯤 해봤을 말을 해본다. 한쪽에서 말랑말랑 달달한 나를 꺼낼 때, 다른 한쪽에서는 음습하고 질척이는 나를 찾아내니까. 누구는 나를 드라마 퀸처럼 굴도록 밀어붙이고, 누구는 내 안에 잔잔한 호수를 만드니까.


그냥 변명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생에 최악의 모습으로 분노했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그런 식으로 화내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상처였으니까. 그런 건 내가 아니었으면 하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누구와 관계 맺는지가 중요하다. 내 안에는 내가 어쩔 수 없도록 수많은 내가 있고, 그중 누가 언제 튀어나올지는 언제나 예상 밖이니까.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 그가 제일 좋은 나를 발견 주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나도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제일 좋은 그를 만나는 것. 그렇게 어디든 도착하는 것. 그게 한라산이든 공항이든 중간에 내리지 말고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