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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울 Mar 22. 2024

엄마의 비밀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잠들어도 되나?’ 14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두 아이를 모두 세상 밖으로 내보낸 뒤 온 힘이 빠져서일까. 눈이 스르르 감기는 듯했다. 자연분만도 분만 후에 전신 마취를 하는 거였던가. 우리 애들은 이렇게 잠깐 보여주고 끝인가. 남편은 왜 나가라고 한 거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현실과 꿈을 구분할 수 없이 흐릿해질 즈음 의사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죽다 살아난 줄만 아세요” 과다출혈로 위기를 맞아 빠르게 수술과 수혈을 했고, 잘 처치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 내용에 잠시 오싹해졌다. 공연히 다태아 임신이 고위험 산모 군에 속하는 것이 아니구나, 다시 한번 실감했다.


생각해 보면 임신 시작부터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초기엔 복수가 차올라 2주간 입원 생활과 함께 시작해야 했다. 출산 한 달 전 조기 진통으로 3주간 또 입원해야 했으며, 너무 부푼 배에 심한 소양증이 와서 출산할 때까지 차가운 수건을 달고 살았다. 또 출산 후에는 치골이 잘 닫히지 않아 앞으로 걷는 것이 힘들어져 한동안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벌써 과거의 일이 되었을까. 막상 엄마가 되고 보니, 앞서 경험한 임신, 출산 관련 고난보다 더 어려운 것이 육아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산부인과 의사라는 전문가가 함께하기 때문에 그들을 믿고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입원했던 기간 마음은 더 편했다. 하지만 아이를 어떻게 기를까 하는 문제는 주변의 도움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오롯이 남편과 내가 결정하고 이끌어가야 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모라는 무게감이 그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우신 거지? 요즘 들어 엄마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기심 가득한, 자유로운, 말괄량이. 그런 나를 언제나 믿어준 단 한 사람. 나에게 있어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이 내가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기껏 보내놓은 학원들을 두어 달 만에 그만 다니겠다고 할 때도, 신방과에 가겠다며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한, 어쩌면 장래가 더 보장된 공대를, 일 년 만에 때려치우겠다고 할 때도, 기어코 다시 들어간 학교에서 성적은 뒷전에 두고 연극에 정신 팔려 있던 기간에도, 졸업하고 다시금 컴퓨터공학 관련 대학원을 다니겠다고 할  때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만난 지 겨우 일 년 된 남자와 함께 덜컥 집을 사겠다고 폭탄선언을 할 때조차 반대는 없었다. 다만 “그럼 그 집엔 누가 살 거냐” 물으셨고, 동거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나를 어이없어하며 “차라리 결혼을 해”라고 하실지언정 내가 선택한 남자와 집을 사겠다는 결정은 믿어주셨다. 그런 엄마를 둔 덕에 나는 진학부터 결혼까지 나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건, 그 모든 결정을 하고서도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엄마의 퇴근길에 전화하다 문득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쩜 나를 그렇게 자유롭게 키웠어?”


엄마는 웃으며 응수했다.


“내가 반대했어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거잖아”

“아니야. 모르는 일이지. 엄마는 처음부터 반대하려고도 안 했어. 그때 기억나?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학교에서 단체로 서울랜드에 갔을 때 말이야. 하얀 뿔테에, 호박처럼 생긴 숏 팬츠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요상하게 신고 간 적도 있었잖아. 엄마는 그럴 때조차도 아무 말 안 했어. 그날 내 모습이 얼마나 큰 이슈가 됐는지 알아?”


엄마는 더 크게 웃으셨다.


“야. 엄마가 그날 아침 너를 얼마나 뜯어말리고 싶었는지 알아? 참느라 되게 힘들었어. 그날 엄마 전화통에도 불났던 거 넌 모르지? 어떤 엄마는 아직도 그날 이야길 한다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엄마의 믿음이 순도 100%가 아니었다니! 심지어 나를 말리고 싶은 걸 ‘겨우’ 참으셨던 거구나.


“근데 왜 안 말렸어?”

“네가 전날 동대문에 가서 예쁜 옷을 산다고 해서 엄마가 용돈까지 쥐어줘서 보냈는데, 거기서 예쁘다고 사 온 걸 어떻게 입지 말라고 그래. 엄마도 고민 엄청 했어.”

“체념했던 거네?”

“어휴.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입고 갈 생각을 하냐.”


엄마가 너무 신나게 웃어 묘한 배신감이 올라왔다. 엄마도 나를 100% 이해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다 이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부모조차 아이를 100% 이해할 수는 없는 거구나, 나도 내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겠구나, 하고.


얼마 전, 그 당시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의 청첩장 모임에 갔다. 매번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서울랜드 이야기가 또 나왔다. 그날의 나의 패션은 친구들에게 항상 재밌는 화젯거리다. 심지어 졸업앨범에 떡하니 박제되어 있으니, 잊으래야 잊을 수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만약에 다정, 다감이가 그러고 소풍을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게. 나는 어떨까. 그날의 부끄러움과 민망함, 수치스러움을 아이들에게 말해주면 안 되는 걸까? 혼자 고민하며 대답을 못하고 있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답을 가로챘다.


“뭘 고민하고 있어! 당연히 뜯어말려야지!”


웃으며 끝난 이야기에 집에 오는 내내 나의 고민은 이어졌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답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이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배운 순도 100%의 존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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