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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이 Feb 02. 202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화. 아버지는 떠나지 마세요

"차분히 들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엄마는 나더러 울지 마라, 침착해라 당부하면서 정작 본인이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끅끅- 슬픔을 겨우 집어 삼기는 듯, 체한 신음만 들릴 뿐이었다.  


"뭐라고? 갑자기..."


사실 나는 눈물도 안 났다. 아버지가 간암에 걸렸는데, 할아버지가 간성혼수로 돌아가셨다. 그놈의 '간', 뭐 이리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지 어이없고 허탈했다. 당장에 냉장고로 달려가서 맥주 한 캔을 깠다. 막 들이켰다. 썩 내키지 않는데도 내 속에 쏟아부었다. 간에 술이 쥐약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망가져봐라 싶었다.


헛트림을 참아가며 한 캔을 순식간에 다 비웠다. 캔을 있는 힘껏 찌그러뜨린 뒤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깡! 캔이 제멋대로 떨어지자, 그제야 눈물이 났다.


엄마가 걱정됐다. 나는 이렇게 속풀이라도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 곁이라 슬프고 분한 내색도 하기 힘들 터였다. 암에 걸린 환자보다, 부모 잃은 자식보다 더 힘들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 생각으로 막막한 모든 순간을 무던히 헤쳐 가기로 했다. 나도, 엄마도 아니다. 이 순간, 가장 힘든 이는 아버지였다.


맏아들인 아버지는 상주가 됐다. 나는 떠나신 할아버지를 애통해하기보다, 남은 아버지가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당장 할아버지 빈소에 가는 대신, 나는 서울에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나에게 내린 특명이기도 했고, 나 역시 그러고 싶었다. 할아버지 임종 날이 아버지의 MRI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하나를 앗아갔으니, 하나는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암이 아니라는, 악성 말고 '착한 종양' 정도면 좋겠다는 희망. 하지만 세상은 내 바람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대신해 진료를 보고, 곧장 할아버지 빈소에 갈 계획이었다. 부득이 위아래 검은 조문 복장으로 병원에 갔다. 대리 진료인 탓에 가족관계 증명서가 필요했다. 일찍이 서울로 출발하면서 서류까지 챙기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간센터 대기실 앞에서 아버지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가 각기 다른 사연과 병을 들고서 와있었다. 상복을 가리고 싶어서 팔짱을 낀 채 구석에 곤히 앉아있었다. 아버지 이름이 불렸다. 마음속으로는 제발 암이 아니길 빌며 다급히 간호사에게 향했다. 접수증과 가족관계 증명서를 내밀었다. 간호사는 나를 주치의 앞으로 안내했다. 주치의는 한껏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아버지가 원래 간이 깨끗하진 않으신데..."


주치의는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꼭 내가 암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에게 아버지의 발병 사실을 전해 들은 다음 날, 나는 가장 먼저 '간사랑동호회'라는 카페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무경험자의 백 마디보다, 겪어본 이들의 한 마디가 절실했다.


태아 혈청 단백(AFP) 수치는 간암의 종양표지자 검사 지표로 많이 활용된다. 즉, 이 수치가 정상 범위보다 높게 나오면 간암을 의심해볼 수 있다. AFP 정상 수치는 0~8.5 ng/mL다. 검사 결과, 아버지는 65ng/mL로 정상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 주치의는 아버지가 언제 입원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곧장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요."


할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오고 싶었다. 더 못됐게는 할아버지에게 자식은 여럿이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하나이기에 내가 더 절박하다고 여겼다.


"아버지가 상중이라 괜찮으실지, 일단 따님 의견은 알겠어요."


고작 10분인데, 나는 그새 너무 많은 일을 안게 된 듯했다. 진료실을 나와서 한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저마다 접수증을 들고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다들 잘 살면 좋겠다'


잘 산다는 건, 그저 '소중한 것'을 얼마나 더 오래 누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닐까. 병원을 헤매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도, 결국 각자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는 데서 나오는 걸 테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버지도, 언제나 부모에게 더 해드리지 못한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왔다. 동생들이 객지로 떠나도, 아버지는 맏아들로서 고향에 남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봤다. 자신이 힘든 순간에도, 더 아픈 아버지를 걱정한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 나에게도 당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그래서 내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아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꼭 살려고 애써주면 좋겠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간암이 아닐 수도 있겠거니 의심할 틈도 없이, 아버지는 입원하게 됐다. 상을 마치면 곧장 암병동에서 지낼 나날이 기다린다. 내 단호한 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다행히 입원일이 빨리 잡혔다. 미리 입원 대기하도록 신경 써준 주치의 분께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 내가 감사할 사람들이 많이 생기길, 이런 이기심이 솟았다. 살면서 얼마든 빚을 갚을 테니, 아버지를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아무에게나 빌었다. 할아버지에게도 빌었다, 아버지는 오랜 나중에 떠나도록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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