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나가자
브런치에 올릴 글을 끄적이다 또 풀리지 않아 짜증과 두통, 답답함이 몰려와 무작정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평소처럼 카페 가서 작업을 이어갈까 하다 그냥 무작정 걷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밖을 나왔다.
집 밖을 나온 오후 세 시. 곧 있을 새 학기 때문에 이사 오는 유홀 차량과 이사 박스가 여기저기 있었다. 설레는 시작을 앞둔 그들을 보며 싱숭생숭해졌다.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오늘따라 부정적인 마음이 크게 깃들여져서 그 마음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오전에 비가 쏟아진 뒤라 축축한 공기 속을 거닐어야 했다. 그나마 조금 선선해 다행이었다. 집 밖을 나와 걷기 시작하는데도 몰아치는 잡생각들로 두통이 지끈거렸다.
어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지? 몇 분 걸을까? 가보고 싶던 카페까지 찍어볼까? 거기서 뭘 사야 할까? 아 머리 아픈데 산책하는 게 맞나? 짜증이 안 가라앉는데 가라앉을까?
그런데 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 방향이 맞을까? 매번 이 질문만 하고 답을 못 찾는데, 이게 맞는가?
난 뭐 하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을 찾는 질문들로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집 안에 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아 일단 나오긴 했는데.. 과연 이 생각들이 흐릿해질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어차피 나온 거, 방에 있는다고 변하는 것도 없겠다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우선 우리 집 뒤쪽으로 한 블록 걸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바로 주택가와 대학 기숙사가 포진한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머리가 아프고 저기압이라 노래도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래간만에 이어폰을 끼지 않고 외출을 해 봤다. 월요일의 애매한 시간임에도 나름 여러 명의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다. 러닝 하는 두 친구들, 강아지 산책을 하는 여자들, 빨랫감을 찾아 기숙사로 들어가는 학생, 이삿짐을 옮기는 사람들 등.
한국에서 지낼 때엔 타인에 대한 궁금증이 별로 없었다. 흐름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겠구나, 나 같은 직장인이겠구나.. 뭐 이런 정도? 그러나 미국에서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길을 내는 삶을 살다 보니, (즉, 백수라서 그런지) 타인의 인생들이 매우 궁금하다. 이 애매한 시간대에서 나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까? 어떤 사람들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문득 주말에 했던 남편과의 데이트로 이어졌다. 오래간만에 다운타운에 들러 산책을 하다 예쁜 공원에 앉아 쉬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우리의 대화가 떠올랐다. 남편과 우리 앞을 지나가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어떤 직업을 갖고 여기서 살고 있을까?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여기에 있을까?’ 질문하며 그들의 삶을 추측해보곤 했던 기억이다. 다양한 인종과 멋진 백발의 노인들을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이런 호기심이 자주 생겨나곤 했다.
이런 생각 속에서 걷다 시계를 봤다. 이제 산책한 지 11분. 아직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순수한 호기심이 아닌 질투심에 기반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지끈지끈. 두통은 여전했다.
집으로 돌아갈지 주택가로 쭉 걸어갈지 고민하다 더 걷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면 더 깊은 땅굴만 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주택가 쪽으로 걷다가 대학 기숙사에 활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입생들끼리 환영회를 하는지, 축축한 잔디밭에 수건 돌리기처럼 동그랗게 모여 앉아 놀고 있었고, 여러 대의 유홀차량들이 정차되어 있었다. 짐을 옮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걸 실감했다. 우리 동네도 다시 바글바글 해지겠구나 싶었다.
기숙사 건물 사이 길을 걸으며 소속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 참 부러웠다. 저 친구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 차 있겠지? 이 명문 대학교의 기숙사는 어떤 학과의 학생들이 다닐까? 대학원생일까 학부생일까? 여긴 기숙사비가 얼마 정도일까? 에어컨이 내장되어 있을까?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쭉 기숙사 건물 사이를 가로질러 다시 주택가로 나왔다. 오른쪽으로 꺾어 집으로 돌아갈까 하며 구글 지도를 켰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내가 궁금해했던 카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지금 위치와 가깝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모험을 떠나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환기를 할 겸 새로운 카페를 가보는 것도 지금 내 산책의 목적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카페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약간의 강박적인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튀어나왔다. 가서 인증샷만 찍고 집에 갈까? 커피는 마셨으니 빵이나 스콘이라도 사갈까? 밀가루가 당기진 않는데.. 그냥 앞에서만 보고 올까?
머리를 강박에서 풀어헤치기 위해 나온 건데.. 또 툭툭 튀어나오는 강박적인 생각들에 진절머리가 났다. 머리를 좌우로 휘저어 그 생각들이 떠나가길 바랐다.
카페로 향하는 길은 조금 큰 도로가로 쭉 걸어가야 했다. 예민해진 신경 때문인지 차 오는 소리가 오늘따라 상당히 거슬렸다. 소음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걷다 보니 카페가 금세 나타났다. 아직 결정을 못 한 터라, 미적대며 카페 건너편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마시고 싶은 것도 없어 그냥 다시 돌아갈까 하는데, 타이밍 좋게도 카페로 가는 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마치 카페로 가보라는 것 같아 결국 그 흐름에 발을 맡겼다.
월요일 오후 세시 반이라는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진짜 자체 제작 빵을 만드는 전문 카페구나~ 브런치 메뉴도 있구나 생각하며 주문을 하러 다가갔다. 당기는 것도 없고, 달달한 것도 그만 먹고 싶어 삼삼한 버터 스콘이나 하나 사갈까 했는데, 스콘도 달달한 블루베리 스콘밖에 없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빵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고 맛있게 생긴 빵들과 달달한 빵냄새가 나는 이곳. 그리고 새로운 빵을 발견한 나. 조금은 예민했던 기분이 누그러졌다. 스콘이 없다길래 그냥 갈까 하다가, 바로 나가기는 아쉽기도 해서 그냥 제대로 달달한 레몬 커스터드 케이크 조각을 사버렸다. 덜 단 디저트가 딱히 보이지도 않았고.. 레몬 커스터드 케이크가 몽글몽글하니 궁금했다. 덜 단 빵을 먹고 싶다 했다 단 빵을 산 이 상황이 무슨 흐름인가 싶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케이크를 사고 인증샷을 찍고 밖으로 나왔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습하고 더운 것이 나올 때보다 심해져 땀이 많이 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갈 때에는 도저히 차의 소음을 견딜 수가 없어 결국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틀었다. 잔잔한 노래를 틀어두고 걷다 보니 저 건너편에 꼬마 아기들이 선생님과 산책을 하러 나왔다. 너무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기분 좋은 에너지가 물 밀듯 내 안으로 쏟아져내렸다. 이 평온한 산책을 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과 이 멋진 동네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한 기쁨. 생각이 전환되며 긍정적인 생각들이 뿜뿜 올라왔다. 그제야 집에서 나올 때 잔뜩 짊어지고 왔던 무거운 생각과 감정들이 가벼워졌음을 실감했다. 시계를 보니 산책을 시작한 지 40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지끈거림도 사라져 버렸다.
신기했다.
불과 40분 전까지만 해도 온갖 고뇌와 우울은 다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40분 후의 난 웃음을 터뜨리고 흥얼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산책의 힘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니... 산책을 너무 소홀히 대했구나 싶었다. 너무 소중한 경험을 한 지금, 서둘러 집으로 가 산책을 통해 긍정적으로 변화한 이 생생한 경험을 바로 글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손에는 레몬 커스터드를 들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여러 명의 사람들을 지나쳐 집에 도착하니 딱 산책한 지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땀으로 젖은 옷은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노트북을 열어 아까 쓰던 글들을 저장한 뒤 이 새로운 글을 써 내려갔다. 방금 있던 일을 바로 노트북에 옮겨 적다 보니, 노트북을 닫고 외출을 하러 나갔던 한 시간 전의 내 모습과 외출 뒤 노트북을 켠 지금의 내 모습이 비교되며 기분이 참 묘했다.
아까 쓰던 글과 달리 술술 써지는 걸 보니 이번엔 이 글이 올라갈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