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었다.
거진 한 달 동안 브런치 글을 쓰지 못했다. 어떤 것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내용 정리가 전혀 되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브런치를 주에 한 번씩 켜고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나.. 흰 화면에 채워지는 검은 글자들은 각기 다른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고 난잡하게 써진 글들을 보며 노트북을 툭- 닫아버리곤 했다. 분명 브런치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늘 글을 쓸 소재가 넘쳐났고 하고픈 말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왜 이런 사태가 온 것일까? 당황스럽고 짜증이 치솟았다.
분명 생각이 많은 나날들을 보내오고 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넘쳐나는데도 이것들이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괴감과 불안함이 뒤덮인 짜증이 극에 달할 때 정말 오래간만에 일기장을 펼쳤다. 한 줄 한 줄 생각나는 대로, 감정이 치미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잊고 있던 한 가지 깨달음이 떠올랐다. 아, 내가 '생산물/결과물'에 집중한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루틴처럼 매일 작성하던 관찰일기와 일기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여겼던 것이다. 관찰일기와 일기는 나를 지키기 위한 아주 중요한 수단인데..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꼭 필요한 부품인데.. 그저 생산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시간낭비 또는 의미 없는 활동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미뤄버렸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요즘 왜' 생산물/결과물'에 미쳐 살았을까? 아마도 벌써 6월이 끝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2024년의 상반기가 끝나간다. 이 생각이 들며 자연스레 나의 상반기를 되돌아보았고.. 내가 목표한, 기대한 것의 반도 못 따라가는 성과물에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초조해졌던 것 같다. 벌써 상반기가 끝난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분명 매 달 무언가를 하며 열심히 살았던 기억도 많이 나는데 왜 지금 남아있는 성과물은 이것들 뿐일까..? 이건 분명히 제대로 마주하고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며 6월의 첫 번째 글을 이 주제로 삼기로 결심했다.
주변에 그림을 시작했다고 말한 지 어언 3년 차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보일 수 있는 완성시킨 그림들의 수가 적었다. 완성시키는 것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그러나 이 일을 업으로 생각하며 도전을 시작하니 여기저기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피드백들이 날아왔다. 비전공자로 처음 그림을 시작하다 보니 기초도 없었다. 사실 이 꿈을 시작하자마자 미국으로 정착하게 되어 혼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꾸역꾸역 독학하며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럴 때, 피드백을 가장한 날카로운 화살들이 날 깊게 상처 입혔다. (피드백이라고 담아두며 되뇌곤 했던 그 말이 연초에 받은 상담을 통해 피드백을 가장한 비난임을 알게 되었다. 피드백과 비난은 다른 것이란 걸 이미 상처가 깊이 파여버린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부턴 그림을 마주하고 완성시키는 것이 너무 무섭고 어렵다. 이 장벽을 아직도 깨버러지 못했다는 것과 그 결과로 그림을 완성시킨 경험이 적다는 것은 충분한 자괴감을 주었다.
그럼 난 그림을 놓고 살았을까? 분명 그건 아니다. 매 순간 연필을 쥐고 또는 아이패드 펜슬을 쥐고 무언가를 그렸던 기억은 꾸준하게 남아있다. 매주 스터디에 꾸준히 참석했고, 스터디 덕분에 주에 3-4번씩은 꾸준히 크로키 드로잉을 수행했다. 6개월가량 크로키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형태력도 많이 늘었고 인체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긴 했다. 동시에 해부학에 대한 필요성과 호기심으로 해부학 원서를 구입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만족스럽지 못할까? 이건 완성된 그림이 아닌 걸까? 내가 원하는 완성된 그림은 무엇인 걸까?
선으로도 충분히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데.. 나는 선이 아닌 면을 채우는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은 것 같다. 채색까지 마치는 것이 나에게 '완성된 그림'인 것이다. 분명 선으로 완성시킨 그림들은 많이 남아있는데도 이리 결핍과 자괴감이 드는 것은 아마도 채색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채우지 못해서인 것 같다. 그리고 사실 크로키를 꾸준히 했다고 해도 급격하게 실력이 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욱 내 현재의 성과물들에 불만족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 주긴 해야 할 것이다. 난 분명 꾸준히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 노력들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하진 말아야 한다.
최근에 남편과 동네 식당에 맥주를 한 잔 하러 갔었다. 그때 내 이런 고민을 듣던 남편이 '아무리 최근에 완성시킨 그림이 한 개뿐이라도, 그 하나의 그림을 채우는 선 하나하나는 그동안의 노력들이 쌓인 흔적들이야'라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왜 이리도 울컥하던지.. 갑자기 왈칵 울음이 쏟아졌었다. 맞다. 비록 충족할 만큼의 양을 채우진 못했지만,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퀄리티가 나오기까지 밀도는 계속 쌓아가고는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는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들이 늘어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의욕과 관심도도 조금씩 떨어졌다. 동시에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도는 높아졌다. 정말로 올 상반기를 되돌아보면 분명 그림에 대한 결과물은 부족하지만 다른 것들에 대한 결과물은 꽤나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지만, 상반기동안 부지런히 무언가는 했던 것이다.
올 상반기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운동'이었다. 보스턴 5K 마라톤을 위해 트레이닝을 하던 연초에 이어 3월부터 3개월째 F45라는 운동을 쭉 하고 있다. 운동으로 육체도 정신도 건강해지는 경험을 쌓아가며 운동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운동은 꼭 이틀에 한 번은 수행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이제는 운동을 하던 것이 몸에 베였고, 여태 해온 것이 아까워 나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며 지속성이 강해졌다. 그 덕분에 살며 처음으로 내 몸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요즘 그 즐거움에 빠져 살고 있다. 모델 한혜진 님께서 어떤 방송에 나와 몸만큼 내가 노력한 대로 정직하게 결과물을 보여주는 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점점 그 말씀이 이해되고 있는 요즘이다.
또 다른 관심사는 바로 '브런치'였다. 별 큰 욕심 없이 시작했던 브런치였는데.. 매주 내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 점점 글에 대한 욕심과 흥미가 커져갔다. 매주 이번 주엔 어떤 내용을 올릴까에 대해 일기와 관찰일기를 들춰보며 고민을 하고 하루종일 글을 써 브런치에 업로드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사실 그림이 종종 뒷전으로 밀려나가기도 했었다. 그림보다 글을 쓰는 것이 더 재밌고 행복했던 것 같다.
사실 2024년의 상반기는 '할 일'이 아닌 나 자신만을 두고 바라봤을 때 상당히 의미가 깊다. 미국에 온 뒤로, 아니 살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건강한 상태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함과 무기력증의 빈도도 정말 많이 줄었고, 회복탄력성도 그 어떤 때보다 높아졌다. 비록 중간중간 스트레스로 이석증도 재발하고 대상포진으로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 시기도 정말 건강하고 씩씩하게 버텨냈다. 몸에 이상이 온 것에 우울해하고 무기력해하고 슬퍼했던 과거와 달리, 올 해엔 몸의 이상들을 마주할 때마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가볍게 스트레스에 대한 경고로 인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나 자신을 돌보는 것'에 더욱 집중해 버리게 되었고, 그 시기들 모두 평소보다 가볍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를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오게 하고 유지시키는 힘이 정말 강해졌음을 올해 많이 느꼈다. 아마도 운동을 시작한 것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몸이 달라지고 건강해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자존감도 높아졌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져갔다. 늘 쓰고 있었던 '부정적으로 보이는 안경'을 안경통에 접어두고 '나를 예쁘고 멋지게 바라봐주는 안경'을 새롭게 착용하게 된 기분이었다. 같은 '나'인데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리도 달라질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운동 외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정말 여행을 자주 다녔었다. 작년 말 런던을 시작으로 워싱턴 DC, 반프 국립공원(+토론토), 뉴욕/브루클린까지. 틈틈이 캠핑장도 가고 근처 도시도 당일치기로 다녀오며 힐링을 많이 했다. 정말 충분히 쉬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쉰 것 같다. 이제는 해야 할걸 하고 싶어 졌을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의욕 배터리가 100% 풀 충전이 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데.. 올 상반기에 그걸 해냈던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어떤 흐름으로 글을 쓸지, 어떻게 결론지을지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는 싶고.. 어떤 것을 쓸지 정리는 안 되고.. 이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커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었다.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지을지 정말 궁금했다. 이번 글도 썼다가 서랍에만 박아둘 것 같다는 생각도 컸다. 그렇게 전혀 의식하지 않고 생각의 흐름대로 토도독 타자를 쳐내려 갔다. 그런데.. 글을 여기까지 쭉 쓰고 나니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희한해 다시 글을 처음부터 쭉 읽어보니 글의 흐름도 정말 신기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었던 시점에서 점점 긍정적인 시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글의 흐름을 보며 다시 한번 더 내가 건강한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구나 확신하게 되었다.
네 가지로 상반기를 정리하고 나니 나에게 있어서의 2024년 상반기의 의미도 달라졌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곳에 눈을 팔고 꿈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게을렀던 시기'로 다가왔었는데, 이젠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한 도약을 한 시기'로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동시에 올해 하반기에 대한 의욕과 동기부여도 풀 충전된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다가오는 하반기에 대한 압도감과 부담감이 컸는데...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은 하반기가 기대되고 설레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글은 발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