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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콜 Apr 02. 2024

달리기가 준 선물

운동이 아닌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달리기

 작년 이맘때 즈음인 것 같다. 친한 언니의 추천으로 '런데이'라는 어플을 깔고 할 생각 반, 하지 않을 생각 반으로 어플을 열었는데.. 지금 난 Runner라는 타이틀을 가진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심지어 2주 뒤면 2024 보스턴 5k 마라톤도 나갈 예정이다!


 미국에 살며 러닝 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접했기 때문에 마음 한 편으론 늘 호기심이 있었다. 강변가를 뛰어다니는, 동네를 마구 뛰어다니는 저 가젤 같은 러너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이 시간에 뛰는 걸 보면 백순가..? 학생인가..?'라는 뜬금없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이 추운데/더운데도 저리 뛰고 싶은가?'라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왜 뛰지? 심장만 아픈데..'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던 해가 지던. 사시사철 바깥을 바라보면 늘 어딘가에 다양한 모습의 러너들은 존재했다. '여기서도 뛴다고?' 하는 경이로움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러너들을 너무 자주 봐서일까..?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밖을 바라보면 항상 러너들이 있는 환경에 몇 년을 살아 익숙해져서 그럴까? 나도 모르게 '나도 달리기를 뛰어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실 난 장거리 달리기와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신경이 나름 좋았는지 단거리 계주는 꾸준히 했었지만.. 지구력은 심각하게 좋지 않아 장거리 달리기는 늘 꼴찌였던 것 같다. (그것도 뛰는 것보다 걷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오래 뛰면 심장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심지어 폐도 아프고. 땀만 나고, 지루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학창 시절 내내 장거리를 대했기 때문인지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장거리에 대한 매력은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내가 못 하는 것 중 하나라는 결론이 이미 나 버린 운동 중 하나였다. 내가 아예 못 하기 때문에 엄두도 안 내는 그런 상태였달까? 코로나 시기에 성인이 된 이래로 처음 달리기를 뛰어봤다. 추운 겨울, 퇴근 후 밤마다 체력증진을 위해 조금씩 달리기를 뛰곤 했는데, 그때마다 1km도 헉헉대며 겨우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지금 8km까지도 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을 가서도 달리기를 하기 위해 러닝화와 러닝복을 챙기기 시작했다. 작년 12월 런던 여행에서 템즈강변을 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이 믿기지 않아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다름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 이질감에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직까지도 달리기를 뛸 때, 문득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어쩌다 달리기에 빠졌을까? 아마도.. 그 시작은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런데이 어플을 깔았을 당시, 부정적 생각과 고군분투를 한참 하던 때였다.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이석증이 오기도 하며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을 옆에서 쭈욱 지켜보던 친한 언니가 달리기를 살살이라도 뛰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추천을 해주셨다. 바깥바람을 쐬면서 기분도 좋고 점점 느는 나를 보면 성취감도 들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금상첨화로 살도 빠진다며 내가 꼭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2023년 5월. 런데이 30분 달리기 8주 코스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정말 헉헉대며 겨우 겨우 훈련일정을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땐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더 호흡이 가파르고 몸도 아팠던 것 같다. 육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나는 달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처음엔 하나씩 찍혀가는 포도알이 좋았다. 오늘의 훈련을 할 때 내레이션을 해주는 성우분들의 응원도 좋았고 하나씩 차근차근 못 할 줄 알았는데 해내는 내가 신기했다. 1분도 못 뛰던 내가 3분을 뛰고, 5분을 뛰고. 10분을 쉬지 않고 뛰던 그 순간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못 할 줄 알았던 내가 조금씩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보며 점점 내가 어디까지 해낼지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기록을 단축해야 한다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이 그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나를 내던지는 경험을 처음 해본 것 같다. 뛰기 싫은 날이나 몸이 무거운 날은 그저 러닝복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가 너무 기특했다. 그때마다 '오늘은 완주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나왔는 것으로 너무 기특해'라며 스스로를 칭찬해 주며 달리기를 진행했다. 정말 신기한 건 그런 날마다 '오잉? 벌써 다 뛰었다고? 다 뛸 생각은 아니었는데..?' 라며 달리기 코스를 완주했던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경험이 1주, 2주, 3주.. 쌓여가다 보니 내 머릿속에 '할 수 있을걸?'이라는 긍정적 회로의 길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장거리 달리기를 해내는 나를 직접 목격하며 나에 대한 태도도 변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며 나를 조금 더 믿어주고 인정해 주게 되었다. 또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생각을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라고 바꾸어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긍정적인 생각의 변화는 달리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내 인생 전체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왜 못 하냐'가 아닌 '차근차근 하면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이것밖에 못 했어?'가 아닌 '이것도 했어?'라고. 새로운 영혼을 뒤집어쓴 것처럼 내가 아닌 나의 삶을 사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나에게 처음으로 '완벽하게 잘해야 해'라는 압박감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게 해 준 경험이었다. 아예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인지, 내가 달리기를 뛰러 밖에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늘 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 긴장을 하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실망시키지 않고 싶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 그게 좀 심하게 강해서 시작을 못 하는 경우도 꽤나 빈번했다. 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곤 했다.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였다. 시작은 하고 싶은데 시작을 못 하니 스트레스고, 시작을 해도 완벽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 하니 스트레스를 받고. 이러나저러나 스트레스를 받는 내 모습이 어처구니 없고 짜증도 나고.. 결국 스트레스를 담는 거대한 항아리가 가득 차버렸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항아리가 넘쳐흘러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경쟁이 심하던 환경에서 10대 시절을 보내서 그런 걸까? 늘 남들과 비교되었고, 친구들은 경쟁자로 여기며 살았다. 내가 모자라서 좋지 않은 결과가 이러하다는 자책을 했던 경험이 90% 일 정도로 피 말리는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성격 형성에 중요한 시기에 나를 부정하고 경쟁하며 비교하는 경험을 더 많이 해서인지 이런 지나친 완벽주의와 책임감이 내 성격의 중심부에 자리 잡혀버렸다. 성인이 되어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도 숨 막히도록 나 자신을 압박했고, 그에 몸도 마음도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어 퇴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나인데. 달리기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경험을 처음 하게 해 주었다. 나에게 잘하지 않아도, 해내지 못해도 그 자체로도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첫 경험이었다. 이건 나에게 정말 큰 의미가 있는 경험이었다. 달리기는 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준 life saver였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꾸준히 뛰었다. 달리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현재를 살고 있었고,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나를 현재에 가져다 놓는다는 것. 늘 과거와 미래에 살고 있는 내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달리기를 뛰며 그 계절도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 여름 오후의 공원의 모습, 초가을 낙엽이 물들기 시작한 공원의 모습, 눈이 쌓인 공원의 모습. 그리고 다시 싹이 트기 시작하며 따스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공원의 모습. 이 모든 계절이 내 안에 쌓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부정의 늪으로 빠져들 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방법을 알게 되었다.

 연 초에 코로나와 대상포진으로 달리기를 한 달가량 쉰 적이 있다. 몸이 안 좋고, 날씨도 항상 흐리고. 기분도 점점 처지고 부정의 회로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남편이 달리기를 다시 시작해 보라 격려해 주었다. ‘그래, 살살이라도 뛰어보자’ 생각하며 러닝복으로 갈아입은 후 늘 뛰던 공원으로 나왔다. 몸이 너무 무겁고 축축 쳐지는 날씨에 의욕도 나지 않았지만, 한 발 한 발 떼어 뛰기 시작했다. 1분, 2분, 3분.. 뛸수록 점점 한 겨울의 우울한 날씨가 아닌 생기 넘치던 여름, 알록달록 아름답던 가을 속을 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잊고 있었던 달리기를 뛰며 가졌던 좋은 기억들이 냄새, 공간, 바람을 통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입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 달리기는 내 삶에 이리도 깊이 들어와 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2024년의 새해 목표를 세울 때에도 달리기가 나에게 알려준 가르침이 스며들어 있었다. 바로 '호기심 안경을 쓰고 내 삶을 바라봐주기'였다. '내가 세운 목표를 다 해내야 해'라는 생각이 아닌, '내가 이걸 해냈을 때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을까?'라고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 어떻게 보면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은 똑같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양과 질은 상이할 것이다. 달리기가 나에게 그걸 알려주지 않았나. 그 가르침을 받아 올 해는 스스로를 완벽주의에 가둬두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달리기가 내게 알려준 대로 그 자체를 기쁘게 바라보고 나를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믿어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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