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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틴K Aug 27. 2023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맞고 틀림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한 회사의 합격자 발표가 나고, 이전 회사 사람들과 모임 자리가 이어졌다. 정말 감사하게도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나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 주었고, 동시에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음에 아쉬워했다. 이전 회사에서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아낌없이 쏟아져 들어온 진심 어린 이별과 축복의 인사들 속에서, 바싹 말라비틀어진 사막 같기만 했던 나날들 동안 사람들의 온기를 얻으며 살아왔구나를  다시금 깨달았다. 조금 더 솔직하게 속마음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고, 대부분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년이 보장된 호봉제의 직장으로 떠나는 나에 대한 부러움도 가득했다. 겉은 대기업의 휘황찬란한 포장지로 싸여 번지르르하지만 실제로는 앞으로의 방향성이 흔들리고 있는 작고 어린 조직 속에서, 우리는 애써 생각하기를 미루고 하루하루 미션을 클리어하기에 급급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불안했던 것은, 눈앞의 선택지가 하나씩 줄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타의에 의해서 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미래의 나에게 주어질 선택지는 과연 존재할까? 물론 앞으로의 노력 여하에 달렸겠지만, 회사 자체가 제자리걸음이라도 하면 다행인 상황에서 이곳에서의 업무 능력 및 영역의 확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내 또래의 동료들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러던 중 팀장님과 술을 함께 하였다. 해외에서 살며 성장한 팀장님은 나의 이직 조건을 듣고 나서 깜짝 놀라며 나를 붙잡았다. 좋은 곳으로 좋은 연봉을 받으며 가는 것은 찬성이지만, 연봉을 깎으며 (팀장님이 보시기에) 내가 가진 역량과 덜 어울리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팀장님이 지적한 두 가지 조건은 이직을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연봉이 아주 많이 깎였고, 신입으로 입사를 해야 하는 이직하는 회사의 구조상 내가 역량을 발휘하기에도 제한적인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내린 여러 가지 이유는 회사의 존폐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정년이 연장되면 65세까지 일할 수 있으며, 매년 연봉 협상의 지난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이러한 이유를 듣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팀장님에게 이직이란 여러 채용 조건들이(특히 경제적인 요건) 개선되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많은 권한이 주어질 때 고려해 볼 만한 것이었다. 안정성을 추구하기엔 내가 너무 젊다는 말씀이었다. 단순히 떠나는 나를 잡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후배를 위해 조언을 주려는 마음이 느껴져 정말 감사했다.


팀장님의 이러한 반응은 신선했다. 보통은 나의 연봉 삭감폭에 놀라다가도, 직업과 직장 자체의 안정성과, 워라밸을 듣고 나면 모두들 수긍했는데, 팀장님이 직업관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도전을 좋아하는 팀장님의 성격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아마 정년, 정규직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이지 않은 서구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팀장님의 의도와는 다르게(죄송스럽게도) 이직하는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다. 한 번의 이직의 아픔을 느낀 나는 이번 이직을 앞두고도 이것이 과연 맞는 선택일까를 수차례 고민했다. 워라밸 개선에 따른 효용이 과연 크게 떨어진 연봉을 상쇄시킬 수 있을까, 나의 앞으로의 커리어에 있어서 과연 새로운 직장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겨우 적응한 이곳의 시스템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에 녹아들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떠오르는 의문과 걱정이 이어졌다. 그런데 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정말 정답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배경과 가치관에 따라서, 바람직한 직장과 이직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현실의 여러 상황들을 고려한 나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하고 난 이후에는 나의 선택을 최선의 결정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곱씹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이직 후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지난한 적응 과정은 아직도 나의 결정에 대한 맞고 틀림을 이따금씩 고민하게 한다. 사실은 정답이 있는데, 내가 너무 나약하고 도전 정신이 약해서 정답에 도달하지 못한 게 아닐까. 쉽지 않은 고민들이지만, 너무 조급해하거나 나를 갉아먹지 않는 수준에서 생각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이미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일들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나의 결심으로 인해서 변화될 수 있는 부분들을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나에게 주어진 선택권과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거의 선택이 맞는지 틀린지에 대한 생각도 지나친 집착은 경계하되 애써 억누르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또 배워나가는 것이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을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는 의지임을.

그러한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임을.

이것만 다시금 되새기며 또 새로운 월요일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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