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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ka Jul 04. 2022

페트병에 갇힌 사나이

he was a pet

그는 거대한 투명 페트병 안에 갇혀 있습니다. 표면이 미끌거려 벽면에 제대로 붙어 있을 수 없지만, 무엇이든 손에 잡으려 발버둥 치는 중이에요. 다행히 병에는 살짝 파여 있는 홈이 있었고, 그는 간신히 벽에 등을 붙인 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고 턱을 당겨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바닥이 훤히 보이지만 이곳에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키보다 열 배는 더 깊어 보입니다. 맑은 물이 주기적인 진동에 이끌려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그의 센서가 아래로 떨어지면 죽을 것 같다는 위협을 감지합니다. 왜? 저건 고작 물일 뿐인데. 평소에도 내가 마시던 물일 뿐인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두려움이 뇌를 관장하기 시작합니다. 숨이 가빠오는 듯합니다. 산소가 부족한가? 이제야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는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위의 세상은 페트병 뚜껑과 같이, 좁고 불투명한 막에 막혀있다는 사실을요. 천장을 닫은 작은 뚜껑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made in... he... make it.'


위와 아래를 번갈아보니, 출구는 그 뚜껑이 유일해 보였습니다. 그 불투명한 뚜껑 사이로 빛이 어렴풋이 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기독교를 믿진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 구원의 빛이 내려오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저곳이 자기가 가야 할 곳이 틀림없었습니다. 이건 계시였어요. 지금 그는 십자가를 등에 진 자세로 벽면의 홈에 기대어 가까스로 서있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독실한 신자가 되는 길을 그분이 열어준 기분이었습니다. 이 뚜껑을 열기만 하면, 뚫어내기만 하면 나의 품에 안길 수 있으리라. 줄곧 의심해왔지만, 진정 존재해왔던 구원자가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구멍에 도달하는 길은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좁아지는 문턱에서부터 파인 홈이 보이지 않습니다. 꽤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 공간에 있는 매끈한 플라스틱의 면들이 광을 내며 현기증을 뱉어냅니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제가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접착력이 강한 손도 없고, 이 상황을 한 번에 타개할 날개도 펼칠 수 없는 미약한 제가 어떻게 저 문을 두드릴 수 있을까요? 극심한 통증이 그의 머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낀 그의 몸이 휘청거리다, 떨어질 뻔했습니다. 가까스로 다시 제자리도 돌아온 그는 위와 아래, 주위를 집중력을 가지고 세심하게 둘러다 봅니다. 그럴수록 올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를 도와줄 친구도, 도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공간엔 고요함이 흐르고, 이따금 물들이 숨결을 뱉어내며 그의 곁을 맴돌지만, 고립감은 가중될 뿐입니다.


또옥.

그가 위치한 공간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에 맺혔던 땀이 물속으로 떨어지고 결의 파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래로 떨어지기는 쉽구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일전에 철봉에 매달렸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사과가 나무에 맺히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가 이어집니다. 그 뒤를 이어 폭포가 아래로 쏟아지는 그림이, 벚꽃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음.

맞아요. 중력이 있었죠. 그러니 올라가는 건 어렵고 힘들지만, 떨어지는 건 당연하고 쉬운 건가 봅니다.

이건 우주의 질서니 인간사에서도 역시 통용되는 거겠죠?

음, 그런데 왜 인간의 질서는 좀 낯설게 느껴질까요. 자연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듯 보여요. 우리 인간은 왜 위로 올라가려고 하죠?


저기 저 평온한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리면, 저는 물에 뒤섞여 조화를 이루게 되겠죠? 물은 저를 수용할 테고, 그럼 저는 헤엄을 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간신히 매달려있는 것도 지쳤습니다. 이제 그만, 질서에 순응해서 떨어질 때에요. "삶을 포기하면 안 돼!" 하지만 생존 본능의 유전자가 소리칩니다. 그리고 뇌를 설득해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예로부터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건 큰 죄악이라고 주장했듯이, 죄책감을 심어 투쟁심을 유발합니다.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뇌는 그 신호에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생존 욕구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번에도 올려야 해요. 그건 미덕이자 질서가 될 테니까요.

그때, 바닥에 꿈틀거리는 것들이 보입니다. 맑은 액체 속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너무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감각이 극대화된 저의 시신경이 그것들을 생물이라고 말해줍니다. 이름도 모를 미생물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치열하게 먹이를 쟁탈하며, 필요에 따라 먹고 먹히기도 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너무 참혹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제 눈은 그 세계를 쫓고 있습니다. 삶의 가장 본질적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지만 속이 거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머리고 몸에 활력이 도는 기분입니다. 드디어, 생존에 대한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미물을 보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이제 제 머릿속엔 위로 올라가라는 외침이 가득합니다.


그의 욕구와는 달리,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그는 천장에 있는 뚜껑을 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려올 뿐이었습니다. 그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결과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눈물과 같이 흘러내렸고, 답답함과 무기력감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라는 법은 없듯이 별안간 페트병 내부에 큰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페트병 내부가 기울더니,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페트병 벽면에 매달렸고, 다행히 물들이 그의 발아래로 흘러가서 새로운 바닥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그는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위에는 기존의 바닥이었던 울퉁불퉁한 플라스틱 면이 위치했고 뚜껑은 수면 아래 존재했습니다.  페트병 세상의 위아래가 뒤 바뀌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난관에 봉착해버렸습니다. 진즉, 수영을 좀 배워놓을걸. 그는 후회했습니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잠겨 숨이 막힐 뻔한 끔찍한 기억이 있던 그는 이후로 바닥에 발을 대지 않고서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잠수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과거를 극복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물밀듯이 찾아오는 딜레마에 그의 머리는 복잡해졌습니다. 어떡하지?


그는 조금씩 내려가 살며시 발을 물에 담가봅니다. 아른거리는 물결들 너머로 보이는 뚜껑에 도달하려면 족히 수십 초는 숨을 참고 헤엄쳐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그 뒤로 연달아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뒤 일어나 지독한 숙취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저는 내려가서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과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두려움을 다시 수장시키고 싶지만 다시 수면 위로 오르는 생각들, 무턱대고 물에 들어갔다가 과거의 기억이 저를 붙잡으면 어떡하죠? 그러다 숨 막히는 고통과 함께 죽어버리면?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그의 몸 전체가 파르르 떨리며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지독한 한기도 찾아옵니다. 아니, 전쟁은 이미 시작된 후고 지금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거예요.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 비명이 난무하고 굉음이 쏟아지는 전쟁터 한 복판에 서서 광기에 휩쓸리기 직전인 상태인 것 같거든요. 과연 승자는 누가 될까요. 전쟁의 끝에 서서 웃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고대로부터 전쟁을 치르고 이겨내 온 백전노장의 바이러스 군단의 기세를 제가 꺾을 수 있을까요. 그때 갑자기 어느 바이러스 병사가 제 몸을 세차게 흔들고 고함을 칩니다. "정신 차려! 적군이 몰려오잖아! 죽고 싶지 않으면 싸워!" 그의 외침에 세상이 일순 고요해졌습니다. 잡음은 사라지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 마냥 아주 느리게 느껴집니다. 세상의 끝에 서는 기분이 이런 걸까요? 네 삶의 끝을 보는 것이라고, 전능함이 달려와 속삭여줍니다.



저곳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열어야겠어요. 그는 갑자기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솟아오릅니다. 영화에 등장하던 배우가 능숙한 동작으로 물속을 누비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던 장면이, 혹은 어떤 남자가 자유롭게 헤엄치며 바닷속 풍경을 만끽하는 장면이 지나갑니다. 그의 눈에는 물속에서 유유히 움직이는 자신이 보입니다. 풍덩.

아아, 인간은 어찌 이리 오만할까요. 물의 품에 안겨진 그는 숨이 막혀오기 시작합니다. 사방이 막혀있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히며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의 몸이 발버둥 칠수록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걸 보니, 늪에 빠진 걸지도 모릅니다. 그의 폐에 서서히 고통이 차오르자, 발밑의 투명한 물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칠해진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죽음이 그의 발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숨을 쥐어짜 내며 크게 뱉어봅니다.

 "끝인지, 또 다른 시작인지. 이 물음의 답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는 답에 대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심, 의혹, 의문이었습니다. "?" 어떤 물음표.

물음표 모양을 한 이름 모를 물고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앞에서 입을 뻐끔거리고 있습니다. 해마와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긴 걸로 보아, 해마 속에 속하는 어류의 하나인 모양입니다. 그 어류는 마치 수중에 들어온 육지 생물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 마냥, 지느러미를 차분히 흔들며 그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유유히 물속을 둥둥 떠 있는 해마를 보며, 그는 자신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까발리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의 삶을 기록했던 기억들이, 뇌에서 빠져나와 그와 분리되고 있습니다. 그의 기억들은 곧바로 분해되어 물속에 녹아들고, 물들은 새로운 식구를 격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환영의 표시로 거대한 파도가 일렁입니다. 남자는 태아로 돌아간 자신을 마주합니다. 이곳은 어미의 포근한 자궁이고, 그는 양수에 몸을 맡긴 포유류의 새끼이며 지금은 태초에 비견할 생명력을 머금은 시간입니다. 태아는 세상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태어날 것이라고, 태어나야 한다며 행동합니다. 이제 남자는 종의 보전에 앞장서는 태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미와 연결되어 있는 줄을 힘껏 잡아당깁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경고의 종이 울립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세계 안팎에서 태아에게로 관심과 보호가 집중됩니다. 먹이와 사랑이 공급됩니다. 곧이어 안정이 찾아오고, 태아를 포함한 종들은 그제야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뒤에서 무언가 남자의 몸을 확 낚아 채 들어 올립니다. 그와 동시에 물들도 천장이었던 곳으로 향해 쏠려가다가 벽에 부딪히면서 거대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남자는 벽면에 겨우 손을 짚고 얼굴을 물 밖으로 내며 거칠게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힘겹게 뜬 눈의 초점이 돌아오고 그 시선이 뚜껑에 닿자, 그는 페트병이 어떤 힘에 의해 수평의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장면들이 물들이 만들어 낸 환영이었다는 사실도요. 세상이 뒤집혔을 때보다는, 더 쉽게 생존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또 하나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남자는 페트병 벽면을 짚으며 조금씩 뚜껑을 향해, 이 세상의 유일한 출구로 나아갑니다. 정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걸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같은 말을 연거푸 중얼거리면서도 탈출하겠다는 목표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더디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떼면서 이제 곧 출구에 다다를 겁니다. 페트병 내부의 세상이 뒤집힌 그 어느 때보다, 출구에 제일 근접한 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 그런데 그는 어디를 향해 감사를 표하고 있는 걸까요.

마침내, 그는 뚜껑을 마주하고 섰습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얼른 뚜껑을 열어, 페트병 장난감 신세를 면하는 겁니다. 그는 양손으로 뚜껑을 힘껏 밀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격하게 두들겨 보기도 하다가, 체중을 실어 몸을 던져보지만 다소 말랑한 부분에 튕겨져 나올 뿐입니다. 미생물들은 뒤에서 그런 그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남자 역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봅니다.

 "열리지 않을 겁니다."

 미생물들의 무리 속에 누군가, 아니 무리들이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그를 보며 말합니다. 남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반가움과, 대화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기이함, 또 확신에 찬 그들의 말투에서 비롯된 의아함 등을 복잡하게 느끼며 물어봅니다.

 "왜죠?"

 "그야 당연히, 저 문은 안에서 열리는 게 아니니까요. 바깥에서만 열리는 겁니다."

 "저 문을 열려고 시도해본 건가요?"

 "아니오. 우리에겐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죠."

 "그런데 문이 안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이건 너무도 당연해서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치 당신이 지금 여기 왜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오오, 젠장할. 남자는 속으로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습니다. 저들의 믿음은 어디서 온 걸까요. 무엇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저들의 눈에는 당위성이 가득합니다. 남자는 미생물들의 믿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분명 이건 누군가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거라고, 남자는 생각합니다. 그가 들은 생존의 부름이 있으니 이에 굴복하지 않을 거라 다짐해봅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나는 계속할 거예요."

 "헛수고가 될 겁니다."

 " 도와줄  아니라면, 방해하지 말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미생물들은 깨닫지 못한 자를 보듯이 안타까워하며 물어봅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먹을 것도, 제대로 잠을 잘 곳도, 무엇보다 같은 사람이 없는 이곳에 갇혀 있으면 더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 같으니까요. 지금 제가 살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테고, 그리고 그건 바로 저 문을 여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제가 여기에 온 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죠. 백번 양보해서 그쪽 말대로 제가 문을 못 연다고 해도, 저는 끝까지 문을 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단, 무언가라도 해보는 게 훨씬 낫거든요. 비록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러다 보면 혹시 압니까? 일말의 살 가능성이라도 생길지. 저와 제가 하는 행동은 다 미약하지만,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끝엔 창대함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걸 믿어볼 거예요. 그럼 후회도,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도 덜해집니다.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 그 어느 순간에 끝이 찾아오더라도 저는 결국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음..."

 미생물들은 비록 수염은 없지만, 수염을 쓰다듬는 행위를 모방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남자의 말에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적절한 대답을 찾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리아나 해구보다도 깊은 수심을 지난 것 같은 눈빛으로, 미생물들은 진지한 울림을 가지고 말을 이어갑니다.

 "이런 순간이, 우리에게 몇 번이고 찾아오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도움을 주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그 의도와 목적은 이해받지 못한 채 옳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결과까지 선하라는 법이 없다는 것, 우리도 잘 압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점이 옳다고 강요할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우리가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당신의 생존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다름에서 비롯된 다양한 선택들을요. 그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걸 좋아해요. 다름에서 비롯되는 완벽하지 않음이야 말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보다 더 완벽한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다름의 체계. 이보다 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없죠."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제 생각을 존중한다면서, 어째서 저를 방해하는 거죠?"

 남자는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되묻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미생물들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말리는 겁니다. 사실 당신은 저 문을 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이런, 우리가 너무 다름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를 했나 보군요." 미생물은 안타까움을 나지막하게 뱉어봅니다.

 "말 그대로, 당신은 저 문을 열 필요조차 없습니다. 당신은 여기서도 줄곧 잘 살아왔으니까요."

 "헛소리! 나는 여기에 갇혔고 이대로 있다간 죽을겁니다!"

 "글쎄요. 언제부터 갇혔는지 기억나십니까?"

 "그건..."

  남자는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무엇하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거라곤, 어느 순간 페트병 벽면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왜 갇혔는지, 어떻게 갇혔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항상 이전의 기억을 당신 어딘가에 수장시키고 왔으니까요."

 "항상?"

 "네. 당신은 자각 못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같은 상황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여전히 우리는 부족했어요. 인정합니다. 그리고 사과드려야겠군요. 앞으로 당신이 받을 충격에 대해서."  

 미생물들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의 몸짓을 취합니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말에 확신이 가득한 나머지, 의문부호가 새겨진 것들을 몰아쳐 묻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저들이 이곳의 상황을 잘 안다면,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언제부터 여기 갇혀있었던 겁니까? 왜 갇혀 있었죠? 그리고 당신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저랑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겁니까?"

 미생물들은 검지를 아래로 가리키며 말합니다. "물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을 보세요."

 남자의 눈이 저들의 검지를 따라 자신의 발 언저리로 향합니다. 맑게 일렁거리는 물결들이, 남자의 시야를 어지럽힙니다. 어렴풋한 형태가 보이지만,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진 않습니다.

 "뭐가 보이나요.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까?"

 "잘 보이진 않지만, 보이긴 합니다."

 "그 모습이 당신이 맞습니까?"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결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시선을 옮깁니다.

 "당연하죠! 이게 제 모습이 아니라면..."

  남자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습니다. 난 어떤 모습이었지? 남자는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임이 없었으나,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가지고 눈을 세차게 비벼댔습니다. 남자의 벌려진 입가 주변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의 손도 진정되지 않은 채 덜덜 흔들렸습니다. 남자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에 힘겹게 말을 뱉습니다.

 "이게... 뭐지?"

 "저희가 미리 드렸던 사과의 내용입니다. 당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당신의 본모습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럴 순 없어!"

 "진실은 때론 잔인하고 외면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있는 모습이, 바로 당신이 궁금해했던 것들의 답입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역시 믿지 않군요. 맞아요. 그러니 여태 우리와 다르게 행동했겠죠. 하지만 믿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과 우리가 같다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으면 또, 이 세계를 부정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말 겁니다. 살고 싶다고 했죠? 그럼 물에 비치는 당신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세요. 당신이 발현하는 빛을 왜곡된 거울에 가두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세요. 그럼 삶의 답이 나올 겁니다."

 남자의 거울엔 사람이 서 있었지만, 자연에 속한 물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곳에선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미생물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실체가 감각의 착각일지, 혹은 미생물들의 교묘한 속임수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미생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 이상 충격은 온전히 남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이번엔, 나락에 떨어져 어둠에 허우적거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뇌전에 젖어든 것 마냥 몸이 떨리고, 하늘에서는 고함이 내리치며 쩍쩍 갈라지는 듯 보입니다. 남자는 무너지는 것이 자신인지, 세계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믿음에 기대어 삶을 지탱해야 할지 근간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이 부조화스럽다,고 느끼는 남자는 어떤 인지부조화를 경험합니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그의 몸이 휘청거리다 정신을 잃고 물속에 빠져버립니다.

 "그의 세계가 무너지는 건 그가 무너진 것이고, 하늘이 그를 버린 것은 그가 그를 버린 것일 테니 그가 행할 건 믿음뿐이여라."

 미생물들은 유유히 종적을 감춥니다. 미생물들의 마지막 말이 공명하며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갑니다. 이제 남자는 물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안식을 느낍니다. 고통과 불안은 사라지고,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합니다. 페트병은 그가 속한 세계였고, 그의 인식엔 어떤 오류가 있었던 걸까요. 페트병에 물이 담겨졌을 때, 비로소 그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그건 그에게 달려있습니다. 앞으로 그는 더 이상 페트에(pet) 갇혀있지 않을지, 혹은 그의 세계 역시 페트가(pet) 아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그가 미래에 페트가(pet)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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