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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노트 Sep 11. 2023

소심하게 소크라테스에게 소리쳤다

다들 나를 뜯어말리는구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커다란 눈은 늘 진심이었다. 내가 영어를 100%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의 시선과 제스처를 통해 그 고백이 진짜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사람의 진심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현실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산뜻하게 연애를 시작하기에는 구질구질한 상황이 내 발목을 잡는 건 당연했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쿵저러쿵 상황을 이야기하며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동갑내기 친구는 단칼에 말도 안 된다며 싹둑 잘라 말했다. 그녀의 판단이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그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냉철하고 단호한 그녀의 잣대. 

현실을 자각시켜 준 그녀의 말이 슬프긴 했지만 충분히 납득되었다. 맞는 말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뭐 말도 안 되는 연애의 시작이긴 하지. 그렇지만 나는 숨기는 것도 없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했잖아. 그도 그 상황을 이해했고... 

그래. 그럼 나도 마음의 문을 열까? 아니지.... 그에게 못할 짓이지. 또래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아닐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한통의 전화를 더 해보기로 했다. 평소 고민 상담을 잘해주는 몇 살 어린 후배 은우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사건들을 늘어놓았다. 잠자코 듣던 그는 명쾌하게 만나보라고 했다! 내 상황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하겠다고 했더니 


"누나 상황을 다 알고 시작하는 건데 무슨 걱정이야. 같이 밥 먹을 때 보니까 진심이던데 " 나의 걱정 따윈 접어두라고 했다. 남자가 보는 남자가 진짜라며 그는 좋은 사람 같다고 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연애나 할 수 있겠어? 움츠려 있지 말고 연애하자는 사람 있을 때 연애도 좀 하고 그래. 뭐 당장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녀석! 역시 카운슬링을 너무 잘한다. 동생의 말에 설득당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나의 결정을 지지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상반된 두 의견을 두고 나는 저울질하는 척했다. 이미 내 마음은 그에게로 기울고 있었으면서...  언어의 장벽도 저만치 높은데  나이도 많고, 이혼녀에 아이까지 있으니... 나의 자존감은 지하 20층까지 내려가 있었다. 내가 뭘 한다고? 연애? 거울을 봐라. 

'너 자신을 알아라.' 소크라테스가 내 귀에다 대고 크게 외치는 것 같았다. 서글펐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애는 당연히 서툴렀고... 용기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급기야 엄마에게 이 상황을 털어놓았다. 미쳤다고 했다. 남의 귀한 아들 창창한 앞길 망치지 말고 놔주라고... 딸이 또 상처받지는 않을까 당신의 진심 어린 외침에 내 마음이 찢어졌다. 


다들 나를 뜯어말리는구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보란 듯이 연애를 해야겠다 싶은 오기 비슷한 것이 지하 20층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내가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후배 녀석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불륜도 아닌데 나 좋다는 사람 내칠 이유가 뭐람! 


소심하게 소크라테스에게 소리쳤다. 

'나도 나 자신을 안다고! 나도 연애할 거야! 해볼 거야! 나도 사람이라고! 나 좋다잖아! 나도 그가 좋아! 좋다고! 그냥 좋아. 그의 눈빛은 늘 진짜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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