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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노트 Dec 03. 2023

가띡? 고딕? 이걸 입는다고?

"처음 만난 그날, 나 어디가 좋았어?"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날 나는 안경 끼고 노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영화 [미드소마]에 나올법한 흰 바탕에 블랙 에스닉 자수 패턴의 원피스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네가 신고 있던 신발이 좋았어."

"신발?"

뭐 당연히 얼굴은 아닌 줄 알았지만 이건 또 무슨 대답인가 싶었다. 전에 물었을 때는 나의 미소가 좋았고, 대화가 좋았다고 했는데 신발이 웬 말인지. 그 신발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 보컬이 검정 가죽워커를 신은걸 보고 비슷한 신발을 검색해 따라 산 신발이었다. 


얇은 소가죽의 검정 부츠는 발목을 훨씬 넘어 종아리 언저리까지 오는 디자인으로 끈을 쫙 당겨 신으면 마치 한 몸이 된 것 마냥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뾰족구두는 절대 못 신는 나에게 최선의 선택지였다. 매일 신어서 너덜너덜 해진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니! 뭐지??


"왜?"  

"그 신발이 참 잘 어울려. 나도 미국집에 그런 비슷한 신발이 있어. 굽이 더 높긴 하지."

"응? 굽이 높다고?" 내 귀를 의심했다. 아! 나는 그때만 해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생겼는데?" 나는 궁금해서 그에게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서 보여 달라고 했다. 

세상에나! 굽이 10cm도 넘어 보이는 통굽의 버클이 10개는 넘게 달린 어마어마한 부츠가 아닌가! 


"이걸 신고 다녔다고?" 역시 그는 미국인이었다. 평소 워낙에 인사 잘하고 한국음식을 좋아해서 한국인 패치가 깔린 줄 알았더니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문화에서 자란 머리 긴 미국인이었다. 


문득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옛날 사진 있어?" 나의 물음에 핸드폰을 만지작하더니 그의 어머니 페이스북에서 10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번개 맞은 빨간 머리에 모든 머리카락은 하늘을 향해있었다. 

"치마를 입고 학교를 간 적도 있어."

"뭐라고????????"

나는 당시에 너무 깜짝 놀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영국식 체크패턴 치마를 이야기한 것 같다.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뭐라고 해?" 

나는 놀란 감정을 애써 누르며 나름 쿨한 태도로 천천히 물었다. 

"가띡" 

"뭐라고?"

"가띡" 

"가띡???" 나는 그게 뭔지 못 알아듣고는 스펠링을 불러달라고 했다. 

"G O T H I C "


Gothic Fashion 고딕 패션은 어둡고, 신비롭고, 고풍스럽고, 동질적이며, 종종 성별이 없는 특징들로 특징지어지는 옷 스타일입니다. 고트 하위문화의 구성원들이 착용합니다. 전형적인 고딕 패션인 드레스에는 염색된 검은 머리, 이국적인 헤어 스타일, 짙은 립스틱 및 어두운 옷이 포함됩니다.
남녀 고트 모두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어두운 아이라이너, 어두운 매니큐어, 립스틱(흔히 검은색)을 바를 수 있습니다. 다른 남성보다 높은 비율로 화장품을 사용합니다. 스타일은 종종 펑크 패션(예: 스파이크 손목 밴드와 초커)에서 차용되며 빅토리아와 엘리자베스 패션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트 패션은 헤비메탈 패션과 이모 패션과 혼동되기도 합니다.
-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나는 원래 패션에 무지했고 그냥 패턴이 있는 옷을 좋아했다. 패턴이 있어 포인트가 되는 옷, 검정을 늘 입었고, 가끔 보라 벨벳, 빨강 포인트가 있는 옷을 입는 정도였다. 옷은 잘 몰랐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레이스나 크로셰 스타일을 재밌어했고, 세일에 이끌려 검정 레이스가 있는 치마를 용감히 사서 옷장에 몇 년을 묵히고 있었다. 내 취향이라 싼 값에 사긴 했지만 그동안 딱히 입을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로는 마음에 들어 사놓은 옷들이 온통 블랙에 레이스가 있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몰랐는데 내가 가띡에 가까운 스타일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트가 있는 날 그 치마를 꺼내 들었다. 택을 그제야 떼어 냈다. 검정 시스루가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리얼 가띡의 마스카라가 짙은 강렬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는 옷장에만 갇혀있던 내가 좋아하는 옷을 드디어 꺼내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신기했다. 그를 만나기 전에 하나 둘 사모았던 옷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를 만날 운명이었나?  


생일날 그가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내가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한껏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뭐지? 뭐 길래?' 나는 푹신한 선물을 만지작 거리며 포장지를 조금씩 벗겨냈다. 

'검은색 후드티인가? 체인이 있는데... 뭐지?' 갸우뚱하며 옷을 모조리 펼쳤는데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긴소매의 후드 티가 맞긴 하는데... 그게 배와 등 부분에는 천이 전혀 없고 소매와 후드로만 이어져있는 체인이 달린 희한하게 생긴 티셔츠 비슷한 거였다. 


'이걸 입는다고? 아! 역시 난 그냥 검정 레이스를 좋아했던 거였어. 저 옷을 어찌 입지?' 내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나는 착하디 착한 그의 연갈색 눈동자를 보며 디자인이 특이하고 예쁘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결국 그 옷은 우리가 일본 여행을 가서야 꺼내 입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하라주쿠 골목길에 서서 딸기 크레페를 먹으며 세상 행복한 우리. 그 누구의 시선도 나 자신의 시선도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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