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월 5일. 키치조지, 쇼핑
이번 도쿄여행에서도 예외 없이 갈증이 일었다.
여행을 가면 나는 하루종일 뽈뽈거리며 돌아다닌다. 발가락에 하나둘씩 잡히는 물집도 나를 막지 않는다. 건물, 사람, 공기, 심지어 전봇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겐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다. 문 여는 시간에 들어가 문 닫는 시간에 나온 전적이 두 번인 바티칸박물관, 세 차례 가보았지만 갈 수 있으면 또다시 가고 싶은 우피치 박물관, 이국의 작은 마을을 이루는 모든 것, 이들은 내 눈에는 똑같이 갈증의 대상이다.
오모테산도, 롯폰기, 긴자, 하라주쿠, 다이칸야마를 중심에 두고 각각의 도쿄 여행에 킬포를 한두 개씩 집어넣곤 했다. 깊이 파묻혀 잊힌 기록을 뒤져서 피천득 선생의 하숙집이 있던 동네를, 검색하거나 물어서 얻은 정보로 나쓰메 소세키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여행마다 한눈금씩 지름을 넓혔다. 이번에는 외연 확장을 위해 도쿄에 충분히 오래 산 '권위'와 비슷한 취향이라는 '실체'를 갖고 있는 분에게 자문을 구했다. 같은 것에 두 눈이 반짝이며, 가슴 한쪽이 동시에 일렁인다는 것이 여행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엔 '서울의 비밀정원'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작년 봄에 이사 온 이후 많은 분을 초대하여 그곳을 같이 걸었다. 어제 갔어도 오늘 가면 나는 또 좋은데, 볼 것이 없다며, 심심하다며, 걷는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분이 있었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도쿄현지분'에게 도쿄와 도쿄 인근에서 가볼 만한 동네 몇 군데를 추천받았다.
'천천히 골목골목 걷기 좋고, 분위기가 비슷하다'라고 추천받은 곳 중 하나인 키치조지가 여행 둘째 날 목적지였다. 번번이 일본인들이 살고 싶은 동네 1위로 뽑힌다는 키치조지는 명불허전이었다.
오이도라인전철에 올랐다. 푹신한 쿠션의 의자에 앉은 나는 몸을 얌전히 둘 수 없었다. 얼마만의 설렘인지. 전철 안을 이리 둘러보았다가 밖을 내다보고, 다시 전철 안을 저리 둘러보았다가 또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계속 설레었다. 휴대폰으로 다음 정거장은 키치조지라는 안내판도 여러 장 찍었다. 전철 안의 사람들 시선을 생각하니 잠시 부끄러웠으나 가슴은 오히려 더 부풀었다.
키치조지 역에 내렸다. 두 눈을 부지런히 굴리고 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역사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쪽인지 서쪽인지 상관없이 그쪽이 가볼 만한 곳이라는 것을 적지 않은 여행짬밥으로 알 수 있다. 운동회날 온 하늘에 나부끼던 만국기처럼 길 양쪽의 전봇대에 매달린 전선이 우리를 불렀다. 끝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길, 양옆으로 이어진 골목들과 또다시 이어진 골목에는 작은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눈코입이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꽉 들어찬 듯한 동네였다. 하루에 하나씩 마음에 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 동네가 내 품에 빈틈없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었다.
처음이니까 오늘은 간만 봐야지 라는 심정으로 키치조지를 오긴 했으나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피고 싶은 곳들 투성이었다. 더 느리게 봐야 좋을 키치조지를 나는 반나절만에 떠났다. 만기 된 적금통장을 보는 심정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신주쿠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쇼핑을 위해 비어둔 나머지 반나절의 동선을 점검했다. 아들과 나는 이번여행에서 사야 할 것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하라주쿠, 아니면 오모테산도 정도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 두 곳에서는 맘에 둔 물건을 구할 수 없었다. 비가 내렸고 어둠이 내렸고 기온이 내려갔다. 해야 할 바를 다할 때까지 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아들과 나는 롯폰기를 거쳐 긴자까지 걸어가서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쥐었다. 빗속을 뚫으며 저녁을 먹기 위해 생각해둔 식당으로 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택시를 탔다. 호텔 내의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샀다. 방으로 올라와 온통 젖은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으니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었다. 숙제를 다하고 책가방을 챙겨 둔 후, 방바닥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한 손으로 과자 봉지를 뜯으며 다른 손으로는 만화책을 집어 드는 심정으로 명란 삼각김밥 비닐을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