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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유신 Sep 10. 2023

잔상 기억

잊지 못하는 기억들

천정에 있는 등을 쳐다본다.

네모난 등 안에는 LED 램프가 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아직 네모난 등이 보인다.


전등을 쳐다보다 꺼버린다.

꺼진 전등 자리에서 아직도 네모난 등을 볼 수 있다.

전등이 꺼진 것이 확실한데 흔적이 남아 눈앞에 아니 머릿속에 있다.


지나간 기억은 흔적을 남기나 보다.

잊혀진 기억들이 가끔 꺼진 전등처럼 눈앞에 아니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상상 속에만 있던 일인지 모르겠다.

너무나 생생해서 기억 속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기억을 못 하는 것인지 실제로는 없던 일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 사람에게 그때 미안했다고 얘기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 때문에 혼자 미안해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일인데 혼자 미안했던 일인지 분명하지 않다.


내 기억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 있는 일인지 아니면 그럴듯해서 실제 있을만한 일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실제 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기억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기억이 만들어지는 원인은 아마도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을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과거에 지나간 기억에 대해 후회하고 만약 다르게 했기를 상상해서 그렇게 기억이 되어버린 걸까?

기분 나빴던 기억과 행복했던 기억이 공존하는 기억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기억들은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보다 앞으로 일에 관심이 많았다.

지나간 일을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설계하는 것이 좋았다.

반복되는 일은 머릿속에 장기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알고 있는데 오히려 매일 일어나는 일은 기억에 없다.

아침에 불은 끄고 나왔는지 차문을 제대로 잠궜는지에 대한 기억은 이런 기억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안 났다.

어쩌면 어느 날 차 문을 안 잠그고 다음 날 차문이 밤새 열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얼마동안은 차문을 잠궜는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익숙해지면 그냥 생각도 안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동창회에 간 적이 있었다.

사실 거의 대부분 친구가 기억나지 않았다.

동창회에 오라고 부른 친구와 몇몇 사람만이 기억난다.

몇 십 년도 더 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사람은 대단한 것 같다.

그때 내가 어디 살았는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랑 친했는지도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나에게 얘기해 준다.

그런 얘기를 들어도 전혀 기억이 안 나서 오히려 미안해진다.

주변 사람도 그 사람에 맞장구를 치며 내 어린 시절을 얘기해 준다.

불편하다.

나도 모르는 내 어린 시절은 남에게 들어야 하다니.

그 사람이 말하는 내 어린 시절은 과연 사실인가?

과거를 잊지 못하고 얘기해 주는 사람은 몇 십 년 동안이나 잔상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이 강렬할수록 잔상이 오랜 간다고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겐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편해진다.

나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사람이나 일이 있었을까?




잔상은 실제와 다른 모양으로 보이다 사라진다.

우리가 하는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잔상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잔상일 수 있다.

실제 일어나는 일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적은 조작할 수 있다.

혼자만 기억하는 것은 조작이 매우 쉬울 것이다.

외부 자극에 따라서 기억이 조작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기 기억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어렵다.

스스로 기억을 조작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잔상을 활용하여 동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책 모서리마다 그림을 그리고 빠르게 넘기면 동영상같이 움직이는 것을 해봤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데 머릿속에서 없는 부분을 연결하며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들어준다.

잔상이 없으면 그림이 단순 연결되어 보일 것이지만 잔상으로 인해 움직이게 된다.

그림을 빠르게 넘길수록 더욱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우리가 가지는 고정관념도 잔상에 의해 나타난 것일 수 있다.

실제 없는 일을 머릿속에서 만들어 중간중간에 넣었을 수 있다.

그래야 더 자연스러워지니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중간에 넣는 기억은 스스로 아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사실을 봐야 할 때 자꾸 잔상에 가려 사실이 왜곡된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때도 사실과 사실 사이에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상을 넣게 된다.

문제를 만들 때부터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변화시킨다.

실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잘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보면서 문제라고 정의한다.

코끼리 발톱 전문가는 코끼리가 아프다고 하면 일단 발톱부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다.

하마 귀 전문가는 하마가 아플 때 귀부터 정밀 검사한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분야에서 문제를 찾고 있고 다른 분야에 일어난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상에 의해 문제가 없어도 문제라고 예측한다.




지나간 일보다는 미래가 더 궁금하다.

지나간 일은 잔상이 남게 되지만 앞으로 일은 잔상이 생기질 않는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상상에 불과하다.

지나간 일은 기억이라고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기억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이 없는 미래는 없을 것이고 잔상이 없는 기억도 없을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미래만 상상하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다.

이 글에 주인공에 대한 얘기가 궁금해진다.

주인공 기억의 잔상을 거꾸로 찾아가다 보면 글이 완성될 것이다.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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