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하루의 소중함
의사가 초음파 영상을 이리저리 보더니 말했다.
“물혹이 몇 개 보여요. 다른건 괜찮은데 여기 하나가 모양이 별로 안 좋아요. 거기에서도 아마 이것 때문에 얘기를 했을 거에요. 그런데 크기가 더 커진게 아니라..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추적관찰은 해 봐야 하니 6개월 뒤에 다시 오세요.”
다행이었다.
초음파 할 때 여기저기 오랫동안 보시길래 내심 걱정했는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모양이 안 좋다라...마음 한 켠에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유방외과를 찾아가게 된 건 작년 말에 한 건강검진 결과 때문이었다.
항상 나라에서 해 주는 기본적인 검진만 받아오다가, 남편 회사에서 꽤 여러가지 항목의 검진을 배우자도 받을 수 있다 하여 대기업의 복지혜택에 감탄하며 유방초음파 등을 포함한 많은 검사를 받았다.
안그래도 출산, 수유 후 검사를 한 번 받아보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당시 초음파 검사를 할 때에도 의사가 오른쪽 가슴을 오랫동안 기계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길래 살짝 우려가 됐고, 검사가 끝날 때 즈음 촬영도 한 번 해 봐야겠다고 그래서(보통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여성들은 치밀유방이라 촬영을 해도 잘 보이지 않아서 유방촬영을 권하지 않는다고 함) 걱정이 되었더랬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며칠 뒤 받아든 결과지의 내용 중 "오른쪽 유방결절이 관찰되었으니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기 바람"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덜컥 겁이 났다.
가족 중 암으로 돌아가신 분도 없고, 할머니 두 분과 외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 장수 집안이라 건강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는데, 이게 머선 일인가...
그래도 내심 '별 것 아니겠지'라는 마음이 더 컸다.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며 "나 별 일 없겠지??? 내가 먼저 가거든...꿀댕이를 잘 부탁해. 절대 다른 여자 만나는건 안돼...ㅋㅋㅋ"라고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만큼 심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말했더니 별 것 아닐거라고...그래도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진을 받아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검진을 또 받아봐야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반응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어느 한 친구는 자기 주변에 친한 언니도 건강검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위 내시경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는데 그로부터 6개월쯤 후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 발견되서 수술을 했고, 이미 많이 퍼진 상태여서 암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치료를 받다가 쇼크가 와서 결국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일어난 일이라고. 암의 성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젊은 나이에는 활동성이 빨라서 몇 개월만에도 금방 퍼지나보다. 그 언니에게는 초등학교에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2명의 자녀가 있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다른 내용으로 산부인과 검진을 받다가 우연히 난소에 암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행히 매우 초기라 빨리 치료가 가능했던 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암은 나랑은 관련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케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도 이제 건강검진 규칙적으로 받고 이것저것 조심해야하는 나이구나. 정말 한순간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며 친구들과의 수다를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전문의에게 검진을 한 번 받아 봐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그러던 중 한 법률상담을 하게 되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하여 의뢰가 되었는데,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며 한국으로 와 가정을 꾸리게 된 베트남 여성의 사연이었다.
자녀 2명을 낳고 살다가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이혼하게 되었고 자녀들에 대한 친권 및 양육권을 가지게 되었으나 최근 유방암이 발병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이 전이가 되어 6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돌봐주기 위하여 베트남에서 친정엄마가 왔는데, 앞으로 자기가 사망한 이후 자녀들에 대한 친권 및 양육권이 전 남편에게 갈까봐 우려가 되어 상담을 신청했다고 하였다.
일단 그 여성의 사연이 너무 안타까웠다.
몇 년 전 유명한 연예인의 죽음과 그에 따른 친권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었고 이를 계기로 법률이 개정되어 다행히 이혼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이혼 전의 상대방 배우자에게 자동적으로 친권이 부활하지는 않게 되었다(민법 제 909조의 2 참조). 상대방 배우자가 친권자지정청구를 해야 하고, 가정법원이 미성년 자녀들의 복리를 고려하여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방 배우자가 자녀들을 양육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녀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해 오던 조부모가 미성년자의 후견인으로 선임되어 법정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가능성은 있다. 또한 친권자인 엄마가 유언을 통해 미성년후견인을 지정해 둘 수도 있다(민법 제931조 참조). 하지만 그렇더라도 미성년자의 복리를 위해 필요하면 법원이 후견을 종료하고 생존하는 부 또는 모를 친권자로 지정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사건에서는 아빠의 가정폭력으로 가정이 파탄난 점, 이혼 후 아빠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점 등으로 아빠에게 친권이 가서는 안 될 이유가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과연 한국에서 생활해 본 적도 없는 베트남 국적의 할머니가 아이들의 법정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할머니는 아직 베트남에서의 생활도 정리하지 않은 채 급히 한국으로 오게 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엄마가 사망한다면 아이들이 한국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상담을 끝마친 뒤, 나는 또 스믈스믈 걱정이 되었다.
유방암이라니...
뭔가 에피소드가 계속 누적되어 나의 걱정과 우려가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는 느낌이었다.
생각만 한 채로 차일피일 미루는 것을 그만두고 당장 병원을 알아보았다. 검진 후 3개월이 지날 때쯤이었다. 병원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유방을 전문적으로 보는 외과가 잘 없었다.
그나마 집에서 아주 멀지 않은 병원을 찾아 예약을 했다. 일부러 여성 의사를 골라 예약을 하는 바람에 며칠이 늦어졌다. 아무리 의사라도 모르는 사람이 내 가슴을 만지고, 또 가슴을 까고서는 병원 배드에 드러누워야 하는데 남자는 좀 꺼려졌다.
병가를 내고 병원에 방문을 해서 건강검진 때 받았던 초음파랑 촬영 씨디를 건넸다.
조금 기다린 후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중년의 여성 의사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짧게 이야기한 뒤 다른 방으로 들어가 누웠고, 촉진검사와 초음파검사가 이어졌다.
검사가 끝난 후 다시 진료실에 앉았다.
의사는 3달 전 검진 때의 영상과 방금 본 영상을 비교해가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오른쪽 가슴에 물혹이 몇 개 있고, 그 중 모양이 좋지 않은 물혹이 하나 있는데 3달 전과 비교했을 때 사이즈가 커졌다면 암을 의심해 볼 수 있어서 조직검사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조금 작아진 듯 하니 우려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6개월 뒤에 다시 한 번 검사를 해 보자.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자주 잊고 산다.
꽃잎 흩날리는 봄바람을 느끼며 따사로운 햇살에 산책할 수 있는 오늘이, 좋아하는 도넛을 냠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내일일 수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히 하루를 살아야 겠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