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보인다더니...
며칠 전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
눈뜨고 코베일뻔한 사건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블랙박스가 있었다... 아니 우리는 블랙박스를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보험회사 직원이 있었다'가 맞으려나.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며 전국에 불어닥친 매서운 한파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콕 신세인 요즘, 주말마다 마트에서 한가득 식료품을 쓸어와도 다음 주말이 되면 먹을 게 없다.
하루 종일 집안의 주전부리를 집어먹고 삼시세끼 알차게 챙겨 먹고 그야말로 돼지런한 생활 중.
토요일 오후, 그 당시도 마트에 먹을걸 털러 가는 길이었다.
유독 그날따라 마트에 온 사람들이 많았다. 하필 시간도 3시쯤,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배도 꺼트릴 겸 장보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마트 안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주차하는 줄에서만 수십 분을 까먹을 정도로 차들이 많아서 마트 안의 상황도 예상이 되었다. 그날도 너무 추워 처음에는 지하주차장 줄에 서려고 했으나 줄이 심하게 길어서 마트와 조금 떨어진 곳의 지상주차장 줄로 갔는데, 그 줄이 그렇게 길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다들 비슷한 처지겠지~ 밥 먹고 카페에 앉아 노닥거릴 수도 없으니 애매한 시간에 집에 있기 답답한 사람들은 다 마트로 집결했나봐~ 다른 지점으로 갈 걸 그랬나.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주차할 차례가 되어 주차를 하고 마트에 들어섰다.
역시나 인산인해. 심지어 사고자 했던 품목들, 달걀이며 냉동만두, 낙곱새, 연어롤 등 이미 품절되어 없는 것도 많았다.
이리저리 사람에 치이고 카트에 치여 정신없는 와중에 눈에 보이는 것들 중 필요하거나 먹고 싶은 것을 재빠르게 골라 담고, 그 와중에 보채는 아들까지 번갈아 챙겨가며 허겁지겁 마트털이를 종료했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는 길, 익숙하지 않은 길로 네비가 안내를 하는 듯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15개월 꿀댕이와 함께 눈 맞추고 노느라 앞을 못 보고 있었다.
차가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1차선에 정차하는 듯했는데, 그때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덜컹거리는 것이 아닌가.
헐. 뭐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 차량과 접촉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남편도 본인은 다 정차했다고 생각하고 창 밖 옆을 바라보고 있어서 앞을 보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뒤차량인 우리 과실인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앞 차량의 상태와 우리 차량의 상태, 앞 차주의 상태를 살폈다.
남편보다 조금 뒤 밖으로 나온 앞 차량의 차주는 60대 정도의 남성이었는데, 다짜고짜 남편에게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냐. 가만히 있는 차를 뒤에서 박으면 어쩌냐. 허리가 아프다."
등등 말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
우리 차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고 운전자인 남편 및 동승자들의 상태는 괜찮은지 등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뒤에 다른 차들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일단 차량 상태를 사진으로 찍은 뒤 번호 교환을 하고 남편은 차로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외관상으로는 두 차 모두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은 이상하다고 그랬다.
"분명 정차했다고 생각했는데... 발이 차가워서 감각이 좀 없었나? 이상하네..."
내가 물었다.
"앞에 차가 뒤로 온 거 아니야?"
왜 그때는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여기서 알아차릴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를 놓침.
경황이 없던 우리는 벙찐 상태로 서둘러 집으로 와서 블랙박스를 켰다.
다행히 블랙박스는 사고 당시의 상황을 잘 담고 있었다.
앞 차량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선의 맨 첫 번째에서 깜빡이를 넣고 서 있었고, 그 뒤로 우리 차가 서서히 낮은 속도로 주행을 하다가 정차를 했다.
그다음 서서히 차가 움직이더니 "쾅"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 덜컹거렸고 나의"어!!"하는 놀란 목소리, 남편의 "어어어~"하는 소리와 나의 "헐~" 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런데 이 때도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째 기회를 놓침.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장님인가, 바보였나 싶은 순간.
그러면서 우리는 "왜 차가 움직였지? 그래도 낮은 속도로 가다가 부딪혔고 두 차 모두 외관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다행이다. 앞 차량 아저씨가 마음이 좋은 분이어서 몇십만 원 정도 합의 보고 끝냈으면 좋겠다~" 그런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허리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보험접수를 해 달라는 앞 차량 차주의 연락이었다. 경미한 접촉사고여서 굳이 치료까지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니 그럼 진료를 받아보셔라 하고 접수를 해 드렸다.
이때부터 너그러운 분이 아님은 확실해졌고, 그래도 이런 사고에 드러눕는다고 나오는 진상은 아니기를 바랐다. 남편은 어쨌든 운전자로서 사고 경위에 대하여 납득이 잘 안 가고 자책하는 마음도 들고 상대방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아 신경이 많이 쓰이는 눈치였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새벽 일찍 눈이 떠져 그 뒤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전 날 사고로 우리 둘 다 마음이 좀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꿀댕이와 놀아주고 책도 읽어주고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갔던 남편이 나오며 하는 말,
"와~ 이 아저씨(순화해서 씀) 입원했다는데??!"
"뭐? 입원?? 진짜 한몫 제대로 챙기려고 작정했네. 마디모 신청해!"
꿀댕이 앞에서 애써 우리는 분노를 누르며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어차피 보험회사에서 알아서 할 테니 우리는 보험료가 할증되는 것 외에 다른 손해는 없을테니까.
그런데 그 아저씨가 처음부터 남편에게 소리 지르며 화내던 순간부터 입원했다고 통보하는 것까지... 그 태도며 행동이 너무 꼴 보기 싫었고 이 기회로 보험료 단단히 뜯어내려고 하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다.
남편은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경미한 접촉사고였는데 굳이 일요일에 입원까지 하셨다니 유감스럽다. 마디모 신청하겠다. 과도한 진료와 보험금 청구는 보험사기에 해당할 수 있으니 유의하시면 좋겠다.
상대방은 답이 없었고, 우리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보험회사 직원과 통화하고 경찰서에 마디모를 신청해 보기로 하고 잠에 들었다(사건 당사자이고 나보다 더 예민한 남편은 이날도 잠을 편히 못 잤던 듯).
월요일이 되었고 남편은 출근을 했다.
나는 재택근무 날이라 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오전, 남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전송된 블랙박스 영상. 사고 당일 우리가 몇 번이나 돌려봤던 그 영상이었다.
정지선을 기준으로 앞 차가 뒤로 오는 것이 명백했다.
갑자기 누가 머리를 탕! 하고 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아챘냐고 물으니 보험회사 직원에게 블랙박스를 보여줬고 단번에 상대방 과실임을 알려줬다고 그랬다. 아니 우린 그동안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어쨌거나 우리 과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니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드는 의문.
앞 차량 아저씨는 정말 본인이 뒤로 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가족창에 이 사실을 알리고 블랙박스 영상을 올렸더니 아빠, 엄마, 동생 모두가 바로 앞 차량이 뒤로 왔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후미등까지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진기어를 넣었을 것인데 운전자가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거라며. 나쁜 사람.
여러 의견을 종합해보면, 본인이 잘못해서 뒤로 후진하는 바람에 가만히 잘 서 있는 우리 차를 들이받았는데, 잠시 짱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 어라? 이것 봐라? 뒤에 사람이 본인이 잘못한 줄 알고 사과를 하네? 잘 걸렸다! 싶어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것이다. 블랙박스가 있으면 어쩌나, 블랙박스 보고 알아채면 어쩌나 잠깐 걱정을 했을 테지만, 어라? 블랙박스를 봤다고 하는데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네?(이때 정말 우리가 잘못했다고 착각했을 가능성 0.1 퍼센트라도 있을까) 블랙박스가 없는데 있다고 하는 건가? 이참에 진짜 드러눕자! 싶어 입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우리에게는 정말 블랙박스가 있었고 우리가 눈이 4개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차의 과실을 알아채지 못한 과실은 있을지 모르나(이건 정말 아직까지 미스터리... 생각하는 대로 보인다더니 정말 섣부른 예단이 얼마나 사람 눈을 멀게 할 수 있는지 이번에 깨달았다.) 접촉사고에서의 과실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정말 지저분한 사람이었다.
우리 보험회사 직원이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말하고 우리 측 과실이 없어서 보험접수를 취소하겠다고 하니, 노발대발하며 "무슨 말이냐, 그쪽이 모든 과실을 인정했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경찰서로 가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도 경찰서로 사고 접수를 하러 갔다고 했다.
남편이 먼저 경찰서에 도착하여 사고 접수를 하고 블랙박스를 제출하여 조사관이 확인을 했고, 앞 차량 100% 과실임을 확인받았다. 그 후 도착한 앞 차량 아저씨. 역시나 남편에게 큰소리로 이제 와서 왜 이러냐고 난리 쳤다고 한다. 경찰이 블랙박스를 보여줘도 되냐 물어 남편이 보여주라 했고, 그것을 보고 상대방 보험회사 직원도 그 아저씨 차의 100% 과실임을 인정했는데, 그때도 그 아저씨 본인은 씩씩대며 납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남편의 말이다. 그러고서 남편은 경찰서를 나왔다.
남편은 정말 화가 많이 났다.
처음부터 본인의 과실임을 알고서도 우리 차에게 잘못을 덮어 씌우려 한 점, 대인 접수를 요구하고 입원까지 한 점, 그 후 본인의 과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점,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아저씨가 보여준 태도가 너무나 불쾌하고 어이가 없었다는 점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조사관이 추후 연락이 와 이건 상대방 과실이 너무 명백한 사건이니 너무 맘 쓰지 말라고 했단다.
그 아저씨는 범칙금을 냈고 보험접수하라고 말해놨으니 보험 처리하시면 될 것 같다고도.
그래서 그 아저씨는 입원까지 한 마당에 우리도 진료나 받아보자 싶었다.
생각해보니 제법 '쿵'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괜스레 목이나 어깨도 뻐근하게 느껴졌다(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다르다 ㅎㅎㅎ). 무엇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커서 진짜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정말 끝까지 발암...
대물접수만 하고 대인 접수를 안 한 것이다.
대인 접수를 거부할 시 진단서와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을 가지고 상대방 보험사에 직접 청구를 할 수도 있고, 금감원에 민원제기를 하면 보험회사가 연락 와 대인 접수를 해 준다고도 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아저씨 태도가 정말... 생각할수록 짜증 났다.
그리고 또 좀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그쪽은 책임보험만 가입되어 있어 정해진 한도 외에 우리가 충분한 피해보상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나머지 치료 및 합의금은 우리 쪽 보험회사의 무보험차상해로 처리하면 보험회사에서 가해자에게 구상한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좀 과한 것 같고.
또 가해차량이 책임보험에만 가입되어 있을 경우 피해차량의 운전자나 동승자가 상해를 입었을 때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형사 처벌될 수 있어 합의가 필요하다. 그 아저씨는 본인 과실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데 합의가 될까 싶었는데, 경찰이 어떻게 말했는지 하루 뒤 급격하게 태세를 전환하여 '본인이 미안하다. 합의를 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연락이 왔다.
하, 참... 대인 접수도 거부하고 있는 사람이... 뻔뻔도 하여라.
남편은 지금 고민 중이다.
그 아저씨가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를 생각하면, 합의할 생각 없으니 벌금 물고 벌점 받아라!! 하고 싶은 마음.
책임보험만 들어놓고 부주의하게 운전을 해서 사고 내고, 오히려 본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정작 피해자인 우리에게 적절한 보상도 해 주려하지 않고 배 째라고 나오는 몰상식한 이 가해자 아저씨.
후...
어쨌든 우리의 과실 없음이 밝혀져서 너무나 다행이긴 한데, 이 사건으로 며칠간 남편은 신경 쓰고, 알아보고, 경찰서 왔다 갔다 하고, 이런저런 연락받느라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한편 유익한 점이 있다면, 덕분에 교통사고 후 대응방법이라든지 보험접수과정 등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
경험만 한 스승 없다더니, 역시 겪어보니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새해 연초에 액땜했다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