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직을 했다.
변호사의 장점 중 하나가 그나마 다른 직역에 비해 이직이 자유롭다는 점.
연차가 쌓이고 어느 분야로 전문성이 굳어지면 폭넓은 영역에 걸친 이직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잘 하는 것 같다.
올해 초 다니던 회사에서 정기 인사가 있었다.
보통 2월 말쯤 이동을 하는데, 이 회사는 전국 법원이 있는 곳에 각 지부 등이 있기 때문에 인사가 엉뚱한 곳으로 날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 희망지수요조사를 하기는 하지만, 결과를 보면 그다지 반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육아나 대학원 등의 사유는 일절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고, 질병이나 간병 정도는 되어야 하는 듯.
변호사의 경우 보통 한 곳에서 2~3년 정도는 근무해야 이동이 이루어지는데, 많은 수가 서울로 오기를 원하므로, 격오지에 근무했던 순서대로 서울 발령이 나는 것 같다.
나도 입사 이후 인천 쪽으로 출퇴근 하는 것이 힘들어 인사철이 다가오면 계속 서울 쪽으로 이동을 해 보려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교통이 좋지 않고, 인구는 많은데 법원은 하나라 일이 많으며, 사건사고도 많은 등 여러 이유로 근무하기를 꺼려하는 곳이지만(실제 집이 인천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천 근무를 희망하는 변호사나 직원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도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서울로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아니 어떻게 인천은 지하철역이 없는 곳에 법원을 지었는지?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내린 후 버스로 갈아타고 내려 출근하는 길이 익숙해지기는 했으나, 한여름 푹푹찌는 무더위와 억수처럼 쏟아붓는 장맛비, 한겨울 살이 에는 강추위에 버스를 기다리는 고통은 때마다 나를 지치게 했다.
이번 인사철에도 나름 별지를 작성해 가며 내가 왜 서울로 와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여기 근무한 지 2년이 되어 나름 기대를 해 봤으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 또 여기서 1년을 버텨야 하는건가.. 그런데 1년 후 서울로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탈출 이유 하나.
인사이동이 이루어질 무렵 함께 근무하던 변호사님 중 한 분이 퇴사 의사를 밝히셨다.
10년 가량을 근속하셨던 변호사님으로, 업무능력도 좋으시고 인품도 훌륭하셔서 함께 일 하며 배울 점도 많았던 좋은 분이셨다. 퇴사 이유를 세세히 다 알 수는 없으나, 반복되는 업무에 권태로움을 느끼신 것 같았다.
새로운 도전을 응원해 드렸지만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나. 남은 사람들은 계속 일을 해야지.
인사이동에 맞추어 그 변호사님이 퇴사한 자리에 비슷한 연차의 다른 변호사님이 오실 것으로 기대했으나, 회사는 다른 변호사님을 보내거나 새로운 변호사님을 채용하지 않았다.
퇴사한 변호사님의 직책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당시 그 곳에서 가장 오래 일했던 내가 부여받게 되었다.
나는 자리를 옮겼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채로 새로운 업무를 떠안게 되었다.
여러 결재 업무가 추가되었는데, 남은 인력들로 그 전과 같은 업무를 해야하는 바람에 해당 직책의 변호사라면 하지 않았던 업무를 계속 해야만했다.
출근하면 테이블 위에 결재해야 될 문서며 조사해야 할 서면들이 하늘 높이 쌓여있었다.
처리하면 또 올라오고, 처리하면 또 올라오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판사 정기인사와 동계휴가 등으로 한가했던 2월이 끝나고 3월이 되자 기일도 속속 지정되었다. 묵혀두었던 기록들을 꺼내 다시 살펴보고 제출해야 될 서면이 있으면 작성하여 제출해야했다.
업무 시간 중에는 쉴 여유가 없었다.
탈출 이유 둘.
그 와중에 지부장님도 바뀌었다.
2023년도에 오셔서 오신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인사 때 이동을 안 하실 것으로 예상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셨다. 내가 원했던 서울 쪽으로 가시길래 내심 부러웠다.
다른 회사도 그렇겠지만 여기도 지부장님에 따라 업무의 여러 부분이 달라지는데, 나는 지부장님의 업무스타일과 성향 등이 나와 꽤 잘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부장님의 이동이 매우 아쉽게 느껴졌다.
사실 지부장님이 오시기 전 알음알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접한 지부장님의 소문은 별로 좋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데 술 마시면 괴팍해진다더라, 성격이 불같다더라...등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실제 본 지부장님은 예상과 달랐다. 이래서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좀 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자리배치도 바꾸고, 인천이 일이 너무 많다며 다른 지부들과 비교한 통계를 내신 후 본부에 강력하게 어필해서 최대한 다른 자잘한 일을 하지 않게끔 해 주시고, 불필요한 업무를 배제해 본연의 소송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등 업무적인 부분에서 긍정적으로 느꼈던 점이 많았다.
성격도 평소에는 유하신 편이었고, 특히 함께 일하는 변호사의 입장을 많이 배려해 주셔서 고마웠다.
물론 우려했던 술 이슈가 두 차례? 정도 있기는 했던 것 같은데 난 그 자리에 없어서 잘 모른다.
술만 안 드시면 좋을텐데.
암튼 그렇게 지부장님이 가시고 새로운 지부장님이 오셨다.
이 분은 전과 달리 소문이 정말 좋았다. 인품이 정말 훌륭하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분이다(생전 처음 듣는 표현!), 진짜 착하시다...등
그래서 기대를 많이 했다.
업무가 과중하고 일손은 부족하지만 좋은 분이 오신다면 어떻게 잘 헤쳐나갈 수 있겠지. 방법이 있겠지.
역시나 새로 오신 지부장님은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투며 늘 얼굴에 머금고 계시는 미소가 좋은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사람이 좋은 것과 업무스타일이 잘 맞는 것은 다른 법.
새로 오신 지부장님은 너무 착한 것과 너무 긍정적인 사고, 거기다 더 해 일 욕심까지 많은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문제라면 문제였다.
일이 많아도, 무조건 다 할 수 있다! 함께 힘을 내 봅시다!
패소할 것 같은, 그래서 다른 변호사들은 다들 안 된다고 하는 답이 없어 보이는 소송구조 사건들마저 해 봅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대리하겠어요?
너무 착하셔서 본부에다 대고 못하겠다는 소리는 못 하신다.
본부는 그 전 지부장님 시절 내려보내지 않았던 민원처리 등 잡무들을 다시 내려보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본인도 일을 열심히 하시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남은 변호사들은 모여서 안그래도 사람은 적은데 일은 더 많아졌다며 괴로움을 토로했고, 전 지부장님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
탈출 이유 셋.
연차가 너무 쌓이기 전에 송무가 아닌 다른 분야의 일을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이미 좀 늦은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새로운 시작에 늦은 때는 없다고도 하지 않았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커리어 플랜도 시대에 따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에.
사실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것도 해당 업무 자체에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어떤 목표를 위한 과정? 단계? 같은 것이었는데, 그 목표가 수정되면서 더 이상 이 회사에서 일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것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송무업무는 사실 내 성격과는 맞지 않는 면이 많았는데,, 이건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물론 이 일을 통한 보람과 이 회사의 여러 장점이 있지만, 내 마음이 퇴사를 원하고 있었다.
이직을 준비했다.
맘 놓고 몇 개월 놀 수 있으면 좋겠건만, 노는게 체질인 것처럼 노는걸 좋아해도 이직처를 구하지 않고 무작정 퇴사했다가는 쉬는 순간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을 안다.
남편은 일을 하고 아들은 어린이집을 가기 때문에 나 혼자 어디를 갈 수도 없고.
세계 여러 도시를 다니며 한달살기하는 로망은 정녕 실현될 수 없는 꿈으로만 남을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채용사이트를 살폈다.
송무가 아닌 분야 중 경력직 채용 공고를 위주로 추리고 그 중에서도 관심이 있는 회사를 추렸고, 몇번의 면접과 기다림 끝에 이직을 하게 되었다.
불쾌한 면접 경험도 있었다.
일을 통한 대단한 성장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편하게 다니면서 연봉도 꽤 쏠쏠하게 받을 수 있어 육아하며 다니기 괜찮은 곳이라고 들었던 회사였다. 위치도 좋았고 건물도 멋졌다.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면접에 충실히 임하고자 했다.
2차 면접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의 출퇴근시간을 물어본 뒤 이어지는 질문,
"8시 반에 출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거에요?"
질문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말했다.
"아, 8시 반 출근 5시 반 퇴근 문제없습니다. "
"아니, 5시 반 퇴근이 아니라 6시 퇴근이죠...."
"아....(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일이 몰린다거나 갑자기 업무량이 많을 경우 가능하겠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원래 시간으로 출퇴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 내용을 남편에게 말했더니 5시 반 퇴근 말했을 때 이미 탈락했다며...ㅋㅋㅋㅋㅋ
또 이런 질문도 했다.
"퇴근 후 업무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거에요?"
아 무슨 꼰대집합소인가...
입바른 소리 하지 못하는 정직하고 진실된 나는 답변한다.
"아.. 요즘 그런 업무연락을 금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연락이 온다면 짧게 답변한 후 다음 날 출근하여 제대로 알아보고 피드백 할 것 같습니다."
암튼 면접보고도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떨어졌다.
면접은 소개팅과도 같다고 하는데, 나와 결이 맞지 않는 회사였다.
오랜만에 몇 번의 면접을 경험하면서 또 한번 나에 대해 알게 되는 점도 있었다.
나는 정말 나를 꾸미거나 포장하지 못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에 특화된 인간이라는 것.
좋은 점도 있겠지만 좀 상황에 맞춘 융통성을 발휘해도 좋을 것 같은데, 아쉬운 점도 있다.
늘상 서면만 작성하고 글로 상황을 묘사하거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익숙함을 느끼다보니, 말하기 능력이 많이 퇴보한 것 같다.
말 잘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만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여러 권 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