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부터 부옇게 내리던 실비가 정오 무렵에 그쳤다. 일상을 잠시 뒤로 물리고 산사를 찾아 나섰는데, 도착해 보니 오가는 이 없어 한적하다. 계곡물을 건너는 조그마한 돌다리 두 개가 연이어 나타난다. 첫 번째는 ‘반야교’라 했고, 다음은 이름 대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난간석에 새겨져 있다.
일주문을 지나 경사진 길을 오르자 오른쪽 아래 계곡 물소리가 요란하다. 엔간히 비가 내린 모양이다. 세 번째 작은 석교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 앞에 잠깐 멈췄다. 오르는 길 중간쯤 왼쪽으로 누각 ‘채진루’, 오른쪽은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에 오르는 마지막 길이지만 건물은 보이지 않고 구름 머금은 하늘만 보일 뿐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숨을 몰아쉬며 도솔천에 이르는 길. 신성한 자리임을 알리는 구조 시퀀스. 그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자 툭 터인 대웅전 앞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산수를 들이켜듯 야릇한 매력이 온몸을 휘감고 돈다.
진산으로 향한 산등성이는 물론 좌우를 둘러봐도 운무가 꿈결처럼 내려앉았다. 불경 독송, 인적, 풍경소리마저 끊어진 경내가 낯설어서 파쇄석 깔린 마당을 조심스레 걸어봤다. 바스락, 바스락거린다. 갓 구워낸 팝콘 먹을 때처럼. 이번엔 잰걸음으로 서너 발자국 더 떼놓았다. 그래도 산사는 무거운 침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요하고 잠잠한 가운데 어떤 음률이 뇌리를 스친다. 아하! 전위 명상음악가 도이터(Deuter)의 ‘침묵의 사원(Temple of Silence)’. 배경음악으로 신시사이저가 연주되고 전곡을 걸쳐 나지막이 흐르는 여성 보컬이 특이한 힐링 뮤직이다.
곡 중간쯤에 이르러 ‘이히히히..’하는 발성 영역이 몇 차례 나온다. 듣는 이에 따라 섬뜩함을 느낄 줄 모르나, 치열한 수행으로 사바세계를 벗어나 깨달음 극치에 이르고자 하는 승려들. 그 간절함의 변주로 들린다.
중반부에서 끝까지 들리는 타악기의 낮고 균일한 리듬 또한, 들뜨고 거친 마음을 체로 걸러 고운 본래면목으로 되돌리려는 묘함이 있으니..
대웅전 계단을 올라 오른쪽 모서리 기둥 앞에 섰다. 산 능선이 꿈틀꿈틀 흘러내려 바다로 스며드는 조망이 일품인데 오늘은 운무가 가림막을 치고 앉았다.
대웅전을 맞보고 있는 건물 현판이 시선을 끌었다. ‘극락전’이라니? 계단을 올라올 때 이 층 건물에 ‘채진루’라는 현판을 보지 않았던가.
물론 대웅전 지대가 경사지다 보니 전면 이 층, 후면 일 층은 수긍이 간다. 한 건물 앞뒤로 이름을 두 개나 달고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여기 왔을 때, 상복 입은 사람들이 영정 앞세우고 ‘극락전’에서 나오던 것을.
‘채진루(採眞樓)’라는 현판이 말해주듯 진리를 캐내는 복층 건물이니, 아마도 그 당시(조선시대) 불경을 강독하거나 익히는 학습장으로 보인다. 승려 지망자가 해마다 줄어든다는 사회적 이슈, 이미 알려진 현상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적절히 운용함에 큰 무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채진루’를 떼어 내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으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채진루 건너편의 노거수가 궁금하여 종무소에 들러 물었다. 나무 이름이 뭐냐고.
“오전에 전화했던 분이시죠? 저 몰라요.”
마침 오가는 젊은 스님이 있어 또 물었다.
“아이고, 저도 모릅니다.”
성인 한 사람이 양팔을 벌려도 손가락 끝이 닿지 않는 거구다. 느티나무와 유사하나 수피가 왠지 달라 보였다. 적어도 수령 이백 년 이상 짐작되는 나무지만 안내 표지판 하나 없다. 이런 무관심은 노거수나 탐방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 것이다. 1981년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될 때 그 끔찍한 현장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지켜봤을 나무다.
곁에묵묵히 서있던 그 나무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름이 무에 그리 대수인가. 시비선악의 분별심은 여래의 가르침이 아니라네.”
대웅전 방향 큰 가지 하나 떨어져 나간 자리에 단풍나무가 터를 잡고 앉았다. 그 틈새에 몸을 부대껴온 것도 맹랑하지만 수더분하게 자리를 내준 임자가 여간 대단하지 않다.
절 초입 난간석의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평서문이 아니다. 가령 이 노거수처럼 버겁고 힘겨워도 자비로운 마음가짐으로써 나날, 좋은 날로 살아가자는 청유문에 가까운 것이다『벽암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