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더는 아프지 마세요. 응?”
나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귀에 대고 말했다. 처음에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지만, 끝에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나마 어머니가 눈을 뜨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형제들과 공유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다시 모셔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올해 5월부터 벌써 다섯 번째 병원에 입원했으며, 주요 병명은 폐렴과 신우신염이었다. 이번에는 폐렴이었다. 면역력이 떨어진 구순의 노인이었기에, 입원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장기 입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화단 가까운 마당에 매화, 사과, 석류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가득했다. 빗자루로 쓸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코끝에 와닿는 건, 외할아버지의 곰방대에 다져진 봉초의 기억이었다.
나뭇가지들이 누가 더 벗겨졌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지만, 태연자약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동백나무였다. 날이 추워지면 진면목을 드러내는 송백과도 닮았다. 예전에 부모님이 심었던 동백은 이제 훌쩍 자라 내 키의 두 배가 넘었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올해 가을, 아버님의 2주기를 맞이했지만, 동백은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집 동백은 어머님의 꽃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날, 아버님 서재에서 흑백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약관의 아버지와 18세의 어머니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크기가 14x10으로, 요즘 같으면 칠순, 팔순 잔치에 사용하는 큰 사이즈 사진과 비슷할 것이다.
뒤에는 병풍이 둘려져 가림막 역할을 했는데, 아래는 산수화, 위에는 화조 병풍이었다. 마당에 깐 멍석 위에 초석을 밟고 선 부모님. 아버님은 두루마기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어머님은 치마저고리에 특이한 부케가 손에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녹색 잎만 달린 동백나무 가지들이었다.
두 분 모두 화실의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표정에서, 감정을 추측하기란 어려웠다. 그나마 성인이 되어 혼례 의식을 치른다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 먼 옛날의 일상 중 단 1초의 시간을 담은 결혼사진, 그 몽환적인 이미지가 겹쳐서 까닭 모를 서러움이 가슴에 밀려왔다.
오늘날 부케는 아름답거나 의미 있는 꽃들로 다발을 묶어 신부에게 쥐어준다. 부모님의 결혼식은 초여름 7월 중순이니, 동백꽃은 이미 다 진 계절이었다. 다른 꽃들은 많이 피었을 텐데, 왜 굳이 동백이었을까.
7월이면 참나리, 원추리, 접시꽃, 백합, 심지어 무궁화도 핀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꽃이 없는 동백잎 다발을 들고 계셨다. 아마도 사시사철 변함없는 동백잎처럼, 부부의 삶도 늘 변함없기를 축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마당에 나가 동백나무를 바라보니 이제 알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예로부터 양반들은 도화빛이 도는 복숭아나 꽃이 뚝뚝 떨어지는 동백나무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집 동백은 부모님의 지고지순한 염원이 서려 있는 나무로, 오래도록 집안에 자리할 것이다.
지금 요양원에서 말없이 누워계실 어머님. 답답함에 겨운 동백의 꽃봉오리들이 빨간 입술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를 기억해 보세요. 너무나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요.”
얼마 후, 동박새마저 돌아와, 포롱 포로롱, 꽃잎을 넘나들며 목이 쉰 꽃들을 거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