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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솔개가 머무는 하늘

by 소운

벌초를 마치고, 아버님 봉분 옆에 앉아 숨을 돌립니다. 전방이 탁 트인 그 개방감 덕분에 좌향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합니다.

좌우로 감싸 안은 물줄기가 산자락 앞에서 만나고, 저 건너 마을에서 흘러내린 물까지 더해져 남해 바다로 향합니다. 아버님의 호 ‘삼은(三隱)’도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의 퇴임 문집이 떠오릅니다. 태어나자마자 국권이 짓밟힌 일제강점기를 맞으셨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해방과 6.25 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오셨다지요. 한글도 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배울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화불단행’이라 했던가요. 시련은 늘 겹쳐오는 법이라지만, 아버님 세대의 고통과 인내 덕분에 저희는 볕살을 쐬며 화초처럼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갖은 풍파를 견뎌내며 체화된 아버님의 근면함과 의지력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고장 난 물건도 버리지 않고 고쳐 쓰셨고, 연금을 아껴가며 적금 든 통장이 여러 개였지요. 한 번 작정한 일은 언제나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셨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오늘따라 더 그립습니다.


요즘 부모와 자식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지만, 아버님은 그러시지 않았죠. 저와 아버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線), 일종의 불가근불가원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아버지를 피해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한학을 하셨던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셨으니, 그렇게 되시는 것 또한 당연했겠지요. 아버지의 침묵은 나의 어린 시절 벽처럼 느꼈습니다. 이제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헤아립니다.

오늘만큼은 그 벽을 넘어 살갑게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명절날 밤이 생각납니다. 형제들이 고향에 모여 부모님과 말씀을 나누다 늦은 시각, 방이 부족해 두 살 아래 남동생과 거실에서 함께 이불을 펴고 눕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큰 방에서 나오시다 우리를 보시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잘한다. 참 보기 좋다.”


거듭 말씀하셨지요. 그날, 아버님의 여린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저 높이, 솔개를 닮은 새 한 마리가 제자리 비행을 하며 날갯짓합니다. 그 푸덕거림이 마치 아버님이 보낸 전령으로 내게 화답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묘역에 오면, 시간은 바람이 되어 봉분 잔디 사이사이를 흐르고 애잔한 허무만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듬해,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께서 우리나라에 다녀가셨던 일 기억하시지요. 그분도 2022년 1월, 열반에 드셨다고 합니다. 워낙 세계적인 영향력이 컸던 터라, 《뉴욕 타임스》에서도 그의 어록을 소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마음에 남습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단지 개념(notions) 일뿐이다.

죽음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들은 실제(real)가 아니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까요. 신이 사후 세계라는 거대한 담론을 인간에게 봉인해 둔 것도, 어쩌면 ‘신의 한 수’ 일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수행자에게나 가끔 귀띔해 주는 건지도요.


며칠 뒷면, 형제들이 다시 이곳에 모일 겁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우리 곁에 계셨음을, 기억이 마르지 않는 한 새기고 또 새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

다가오는 봄이 과연 달갑기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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