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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푸딩 Mar 11. 2022

[친애하는 나에게] 02. 피부가 얇은 사람

: 언제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

어렸을 적 나는 아기 답지 않게 잘 울지 않았다고 한다. 젖을 물려주면 주는 대로, 옷을 입혀주면 입은 채로 인형처럼 조용하고 매사 무덤덤했다고. 예전에 가족들한테 들은 얘기를 하나 해주자면, 할머니 친구분께서 우리 집에 놀러 오셨는데 아이 소리가 나지 않아 내가 있는 줄 모르고 큰방 문을 열고 엄청 놀라셨다나 뭐라나. 그 정도로 우리 집은 아이 키우는 집답지 않게 울음소리 하나 허투루 새어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속도가 유난히 느렸던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꽤나 오랜 로딩이 걸렸던 건 아닐까 추측한다. 아기일 때에는 너무 울지 않아 걱정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건 기우였던 게 틀림없다. 현재의 나는 늘 터져 나오는 눈물 막으려 고군분투할 때가 많다. 어렸을 때 울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기라도 한 걸까. 




나는 늘 내가 우는 모습이 싫었다. 우는 모습이 ‘눈물을 흘린다’보다는 ‘울음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에 가까운데, 어딘가 터져 밸브가 날아간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흘렀다. 불규칙적으로 와르르. 눈물만 나오면 다행일 텐데, 콧물도 같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더욱 싫을 수밖에. 게다가 울음이라는 게 불수의적인 거라 내가 손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싫었다. 터져 나온 눈물을 쓸어 모을 때면 그 행위가 섧게 느껴져 또다시 꺽꺽거리며 울곤 했다.     




조금 자라서는 내가 계속 우는 이유에 대해 궁금했다. 한창 자라나는 꿈나무 시절에는 ‘키와 몸집이 커지듯 눈물샘도 비례해서 자란 게 아닐까’라며 생각하기도 했고, ‘전생에 피도 눈물도 없었던 사람이라 눈물로 그 죄를 씻는 것이라’ 여긴 적도 있었다. 나름 이공계인이라고, ‘인체 프로그래밍 잘못되어 땀으로 나와야 할 수분이 눈물로 나오는 거야’라는 어설픈 유사과학 논리를 펼치기도 했지만 모두 답이 되지 못했다. 어떤 이유를 붙이건 나는 눈이 자주 젖어있던 아이였다.           




눈물은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마중 나와 있었다.(난 지금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그것도 아주 자주.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냐며 엄마들이 아이를 혼내는 마음을 이럴 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혹여, 눈물샘에 이상이 있거나 안과적인 문제인가 싶어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도 있지만 민망하게도 내 눈은 아주 건강했다. 심지어 상위 몇 %라고 부모님께 잘 물려받았다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도 들었지만, 여기서도 답은 못 찾았다.     




별거 아닌 것들에 눈물을 쏟아내는 내가 싫었다. 감정이입을 제법 잘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닌 것에도 감정이입을 곧잘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10살 때, 수학학원에서 문제집을 풀고 각자 채점을 하는 시간. 옆자리에 앉은 남자아이(A 군)가 채점할 색연필이 없다며 나에게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넓은 아량으로, 그날 학원 오기 바로 직전에 샀던 300짜리 빨간 색연필을 쓸 영광을 A에게 넘겼다. 뿌직. 내가 베푼 아량을 A는 몰랐는지 색연필을 빌린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두 동강이 났다. 뿌직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난 고개를 홱 돌렸고, 눈이 마주친 A는 흠칫 놀랐다. 1... 2... 3... 툭..투둑... 맞다. 울었다. 방년 내 나이 10세, 300원짜리 색연필이 부러진 게 너무 슬펐다. 곱디고운 빨간색 색연필을 내가 써보지도 못했는데 부러뜨렸다는 사실에 화도 났다. 부러진 색연필을 보며 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자 A는 새로 2자루 사주겠다는 말만 한 뒤 슬쩍 자리를 옮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걔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이게 울 일인가 싶겠지만 어쩌겠나. 부러진 빨간 색연필에도 서러워하던 나인 것을. 이런 일들로 내가 울면 주변 사람들이 자주 황당해했는데 간혹 '이런 물건에도 감정이입을 한다고?'라는 시선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그런 반응들은 이따금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눈물이 많아지면서 걱정도 덩달아 많아졌다. 특히나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경우나 내가 잘 보여야 할 자리에 가야 될 일이 생길 때 무수한 걱정은 곱절이 되어 나를 짓누르곤 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 나를 이상한 아이로 보진 않을지, 면접을 보러 가서 행여 내가 울지는 않을지, 상사에게 나쁜 피드백을 받을 때 눈물이 새어 나오지는 않을지, 내가 우는 모습을 들켜 이상한 소문이 나지는 않을지, 잘 우는 사람이라 나약한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을지 등등. 온갖 걱정이 많아지다 보니 미리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고, 상대방의 말에 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혹여 저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 어떡하지, 내가 준 선물에 트집을 잡으면 어떡하지 등등. 마치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속으로 끊임없이 나쁜 상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착각하며 남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로 스스로 끌어내리기 바빴다.

     

  


지금은 난, 내가 눈물이 많은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예전에 유시민이 한 프로그램에서 허수경 시인에 대해 “피부가 너무 얇은 사람”이라며 깊은 감수성을 짚은 적이 있다. 조금만 추워도 에는 듯한 추위를 느끼고, 조금만 더워도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예민한 감성을 타고난 사람 같다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남들보다 한 치 더 얇은 피부라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라고. 극복이라는 말로 포장한 채 나를 낮추는 온갖 말들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게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니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나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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