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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푸딩 Mar 16. 2022

[친애하는 나에게] 03. 내가 사랑하는 생활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고 

나는 9월을 좋아한다. 내가 9월에 태어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봄과 다른 새로운 결을 가진 9월만의 시작하는 느낌이 좋다. 학생 때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느낌이 좋았고,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교복이 바뀌어 새 단장을 하는 듯해 기분이 괜스레 좋기도 했다. 나무들이 싱그러운 푸른빛에서 울긋불긋한 색으로 제각기 다른 옷을 갈아입는 것도 좋다. 이름 모를 들꽃이 길 곳곳에 피어나는 것도 좋다. 가을 도로에는 꽃잎이 잘고 꽃송이가 작아 푸르른 풀 잎사귀들 사이에 물감으로 점을 찍어놓은 듯한 꽃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작고 하찮으면서도 소중한 느낌이 들어 별거 없는 내 인생 같아 좋다.   



        

9월은 온도와 냄새가 크게 바뀐다는 점도 좋다. 장마와 태풍으로 비가 많이 내리던 시간은 지나갔기에 공기 중에 물기가 덜어지고 불볕더위도 한풀 꺾인다. 이후 약간 마른 듯하며 3 ~ 4℃ 낮아진 밤공기는 나를 숨쉬기 편안케 한다. 이때 코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바람 냄새가 좋다. 밤 산책에 최적화된 환경이 저절로 세팅되기에 이어폰을 끼고 걸으면 (내 또래라면 알만한) 싸이월드 감성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손끝, 발끝을 간지럽히기도 한다. 이 기간만큼은 시대 최고의 귀차니스트인 나도 매일 집 앞 공원을 나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순간을 즐기러 나오는 이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더위에 잠시 운동 휴식기를 가졌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둘씩 공원으로 모여든다. 공원은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차고,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말들과 에너지에 나 역시 저절로 충전되는 기분이 종종 들어 좋다. 



         

나는 가끔 알람 없이 일찍 일어난 아침을 좋아한다. 밤에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탓에 나는 아침이 힘들다. 새벽 2-3시까지 뒤척이다 잠드는 게 익숙한 나에게 잠을 자기 직전과 잠에서 막 깨어난 시간은 나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지고 개운함마저 들면 오랜만에 푹 잔 듯하여 좋다. 게다가 덤으로 시간이 생긴 기분이 들어 좋다. 남들보다 몇 시간을 더 사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같은 일상을 반복해도 평소보다 시간이 남기에 내가 바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해진다. 기분이 좋아서일까. 이럴 때 하는 일들은 모두 잘 되고 수월하게 느껴져 좋다. 능률 200%의 ‘맡겨만 주십시오’ 척척박사 모드라 미뤄둔 일들을 하기에 적합하다. 예를 들면 싱크대에 쌓인 무너지기 직전의 설거지 탑을 철거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그렇게 작업이 끝나면 또 뿌듯해하고. 일 년에 몇 번 없는 이날들을 좋아한다.   



       

나는 끝까지 다 쓴 물건을 좋아한다. 뒤축이 다 닳을 때까지 신은 운동화, 바닥을 보이는 스킨, 플라스틱이 훤히 드러난 립밤, 끊어진 머리끈, 구멍 날 때까지 해진 양말과 옷가지들, 반으로 가른 치약, 작가의 말부터 에필로그까지 끝까지 완독 한 책 등등. 싫증을 쉬이 내 변덕스럽고, 항상 물욕이 가득한 성격인 나에게 끝을 본다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특별하다. 끝을 보이는 물건을 보면 나의 시간을 치열하게 함께해 준 것만 같아 좋다. 특히나 끝까지 읽는 책보다 중간에 멈춘 책들이 많기에 완독 한 책은 더 애틋한 느낌이 들고, 끝까지 읽을 수 있게 써준 저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끝을 함께한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슬프지만 유의미하다.         



  

나는 잘 개어진 수건을 좋아한다. 이건 주부가 되고 나서 생긴 새로운 취향이다.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나는 빨래 중에서 유독 수건에 신경을 많이 쓴다. 희고 깨끗하며 예쁘게 잘 개어진 수건을 쓰면 내가 소중한 사람이고 대접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다. 내가 좋은 호텔에 묵을 때면 화장실과 수건을 제일 먼저 확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머리가 복잡하거나 슬픔이 밀려오는 날에는 우울한 감정을 따뜻한 물로 잘 씻어내고, 혹여 남아있는 슬픔의 잔해를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내는 행위도 좋아한다. 수건은 내가 슬픔이로 변하지 않게 얇은 방어막이 되어준다. 



           

이외에도 나는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잘 내려진 맛있는 커피를 좋아하고, 차는 페퍼민트를 좋아한다. 의자가 편안한 카페를 좋아하고 그곳에서 몇 시간이나 담소를 나누거나 글 읽는 걸 좋아한다. 남편과 상황극을 하며 낄낄거리는 걸 좋아하고, 편지나 쪽지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리듬이나 음악이 나오면 그에 맞춰 몸 흔드는 걸 좋아하고(걱정하지 마셔라. 아무 데서나 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몸부림이 재밌어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좋다.         



  

이렇듯 나는 내가 사랑하는 생활, 즉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게 좋다. 취향이라는 게 원래 돈, 시간, 에너지를 랜덤 하게 태워 뽑아내는 뽑기 같은 거라 언제 어떤 게 걸려들지 모른다. 내가 앞서 말한 것들이 나의 취향임을 아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아직은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보다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것들이 더 많다. 앞으로도 수많은 시도의 결과물을 확인하겠지. 그중에는 물론 꽝도 있을 거고 뜻하지 않게 ‘오~ 내가 이런 걸 좋아했어?’라며 대박을 뽑기도 할 거다. 이런 조각들이 모여 다음의 나를 만들어 준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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