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의 기본 욕구인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까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단 한 개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하고 싶은 취미 그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마디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상황에서 ‘행복’을 어디에서 마주할 수 있을까.
육아하는 것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셜 온라인에서가 아니라 바로 근처에서. 아니 바로 옆, 내 남편이 그랬다. 첫째 아들을 낳고 3개월 만에 복직한 후로 쭉 남편이 키웠다. 어린이집도 25개월이 되어서야 보냈고, 나는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때여서 집에 오면 아기가 잠들어 있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자기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행복했단다.
남편이 좋은 아빠라서 좋았겠다고? 뭐 물론, ‘편하긴’ 했다. 내가 없어도 잘하니까. 하지만 난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둘째를 맞이하면서는 두려움도 커졌었다. 나는 저렇게 못할 것 같은데.
시작된 육아는 아니나 다를까,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틈이 없었다. 머리는 학령기가 시작된 첫째 학업 신경 쓰기 바쁘지, 몸은 쉴 새 없이 둘째의 기본욕구 채워드리기 바쁘지, 잠은 부족하지, 그 와중에 나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터져버리는 우울감 다스려야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둘째의 햇살 같은 미소도, 탱글거리는 살결도. 그저 귀를 찌르는 울음소리와 자기 싫어하는 발버둥만이 내 몸에 새겨질 뿐이었다.
만 7개월이 된 시기가 되어서야 남편이 했던 그 말이 조금은 공감이 된다. 제법, 막 안아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탱탱한 몸을 갖게 된 지금에서야, 나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치는 것 같은 그 웃음을 오롯이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날 향한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지나가면 보지 못할 완전한 형태의 행복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난한 육아노동의 현장에서 찰나의 순간으로 스쳐 지나간다는 맹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즐길 수는 있게 되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육아를 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되뇌어본다. 꼭 “행복”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행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자고. 그저 행복해 보이는 아가의 얼굴에서 기쁨을 찾아보고, 나라는 존재를 세상의 전부로 여기는 내게 벅차기만 한 사랑스러움에 그저 집중하다 보면, 그 세계의 경이로움에 취해 하루하루가 잘 흘러간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