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달은 45km
불수사도북 종주 코스가 있다. 서울 강북에 위치한 5개의 산.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각 산의 앞글자를 따서 붙여진 종주 코스이다. 총 거리 45km.
주기적으로 등산을 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코스.
처음 이 코스를 접했을 때 누가 이런 미친(?) 코스를 만들었고 타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온 성공하신 분들의 후기를 찬찬히 읽어보니 감동이 있었다.
길고 긴 길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고 많은 것을 느낀 분들의 글이 가슴을 서서히 움직이게 했다.
산에 대한 애정이 쌓여갈수록, 불수사도북은 꼭 한번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되어갔다.
22년 40이 되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앞두고 있는 지금.
해야겠다. 이젠 해봐야겠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3/26일 밤 10시 37분 긴장되는 마음으로 출발점인 공릉사백세문 앞에 섰다.
첫 관문인 불암산 정상에 도착.
반짝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함께 실루엣으로 보이는 내가 가야 할 산들이 눈앞에 들어왔다.
정상에는 나와 같은 도전을 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3명 이상. 서로 사진을 찍고 격려해주기 바빴다.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으니 혼자 도전하는 자신이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 또한 나의 선택!
걸음을 두 번째 관문인 수락산으로 옮겼다.
수락산까지 가는 길은.. 정말 무서웠다.
어둠 속 산길을 혼자 걷는 건 사실 많이 무섭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나뭇가지며 낙엽도 무서운 얼굴로 비치고 작은 소리에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긴장한 탓일까? 바위길 구간에서 길을 잃어서 절벽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속으로 되뇐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다행히도 네이버 지도 덕분에 (고마워요 네이버) 방향을 찾고 무사히 수락산 정상에 도착했다.
도정봉을 지나 1차 휴식 장소인 회룡역으로 하산하는 길에 바위에 잠시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 빛을 내고 있는 북두칠성.
불어오는 바람소리
뛰는 내 심장 소리
내 쉬는 숨소리
고요한 자연 속에 살아 숨 쉬는 자신을 다시 느껴본다.
이 넓은 세상에 작지만, 난 살아있다.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를 깨닫는다.
1차 휴식 장소 회룡역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코로나로 인해 새벽 5시까지는 포장만 가능한 상황.
그때 시간은 새벽 3시 30분. 1시간 30분을 쉬기엔.. 너무 시간이 길었다.
따뜻한 곳에서 잠시 몸은 녹이고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은 어쩔 수 없이 취소.
롯데리아에 잠시 앉아 양말만 갈아 신고 3번째 관문 사패산으로 향했다.
사패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 이상하게 다시 힘이 났다.
1차 2차 관문을 무사히 마친 기분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섞여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또렷이 떠올라 있던 그믐달이 오르는 내내 나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새벽녘, 산 밑에 있는 사찰에서는 맑은 목탁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수락산에서 그렇게 무섭던 산길이 달과 목탁소리에 더 이상 무섭게 다가오지 않았다.
작은 것들에서 안도를 느끼는 스스로를 보며 일상에 깨닫지 못하고 지나갔던 많은 것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여정을 마치면, 스쳐 지가는 작은 일상에서도 소중함을 깨달으리라. 다짐을 해본다.
사패산을 도착하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었다.
서두르면 포대능선에서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바로 4번째 관문 도봉산을 향했다.
그렇게 맞이한 포대능선에서의 일출.
전날 내린 비 덕분에 화창했던 날씨.
동그랗게 떠오르는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일출을 보면서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의 곁에 있는 소중한 인연들. 사랑하는 사람. 이제는 연이 닿지 않는 옛 인연들까지도.
모든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원했다.
혼자 산을 타고 있지만, 그 순간은 혼자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나란 사람은 결국 많은 인연에 겹겹이 쌓여 살아가는 사람.
소중한 그 인연에 감사함을 느꼈다.
도봉산 정상. 신선대에 도착했다.
이때만 해도 자신감이 벅차올랐다. 쉽게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 이런 자신감이 자만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
산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이때부터 느끼게 된다.
도봉산에서 북한산 입구까지 내려가는 길은.... 정말 길고 힘들었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바뀌는 순간, 호흡은 흐트러지고 온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이때 처음으로 과연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도봉산까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한다고 내가 뭐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충분히 잘했어.. 이 정도까지만 하자..'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던 옛 습관의 상념이 스멀스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때 멈추고 쉬었으면.. 아마 완주하지 못했을 것 같다.
생각을 멈췄다. 북한산 입구까지 정말 아. 무. 생. 각. 없이 그냥 걸었다.
생각을 지우고 그냥 하면 남는 건 결과다.
그렇게 4번째 관문 도봉산을 무사히 마쳤다.
2차 휴식처에서 컵반으로 요기를 하고 지친 발을 풀고 몸을 추슬렀다.
대망의 마지막 관문인 북한산 코스를 향했다.
불수사도북을 먼저 하신 선배님들의 글을 보면, 불수사도 북! 북! 북!이라고 하셨다.
그만큼 마지막 북한산 코스가 제일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이었다.
앞에 4개 산을 합친 것보다 북한산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코스가 제일 힘들었다.
영봉을 지나 백운대를 찍고 문수봉으로 향하는 길까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거의 무의식으로 '쉬면 안 된다. 쉬면 안 된다' 이 생각 하나만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도봉산에서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지웠다면, 북한산에서는 그런 의식조차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동안 쌓았던 등산의 내력은 이때 발휘되었다. 무엇이든 꾸준히 쌓으면 어느 순간 나타난다.
어떻게든 버티고 걷고 또 걷고 또 걷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가는 시간은 없다. 차곡차곡 쌓으면 반드시 발현하게 된다.
문수봉에 서서 마지막 비봉능선을 바라봤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북! 북! 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일은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마지막 중의 마지막 비봉능선을 타면서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까지 와서 다치면 안 된다. 헛디디면 안 된다.
한걸음 한걸음 집중하면서 걸었다.
잠시 허리를 필 때 눈앞에 보이는 맑은 하늘과 절경의 북한산이 이런 나에게 힘을 주었다.
악명 높은 너덜길에서도 산이 나를 응원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대호아파트 계단을 마주했다.
해냈다. 내가 했다. 주먹으로 내 가슴을 치면서 스스로 축하했다.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게 뭐라고 이야기하실 수 있겠지만.. 그 걸음걸음에 스쳐간 수많은 상념과 감정, 깨달음. 그리고 40에 다시금 느낀 나에 대한 믿음.
이 글은 적는 지금도 그 감정이 심장을 치고 있다.
'잘 살아왔다. 잘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해왔다.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 어떤 일이 다가와도 이 마음을 잊지 말자.'
불수사도북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늘 불신했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산 위에서 얻는 것은 산 아래에서 펼치라고 주는 것이라 한다.
이제 다시금 산 아래 내 삶에서 산이 준 많은 것을 펼치며 살아보자.
그렇게 그렇게 잘 살아보자.
45km를 18시간 남짓 걸었던 여정을 정리해보았다.
내디딘 걸음걸음이 쌓여 나의 이야기가 된다.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가자. 나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