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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Jan 22. 2024

아빠네 집

- 서랍 속 동화 4

 아빠네 집



“별별별! 엄마 뽀뽀 해 주고 가야지?”

엄마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볼에 바람을 넣고 물러섰다가 이내 엄마에게 다가서서 뽀뽀를 했다. “아빠네 집에 안 가면 안 돼?”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지 못했다. 엄마가 “왜?”하고 물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아빠의 상황을 완벽히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니까.

“금요일까지 전시회 낼 작품 정리 하고, 토요일에 평화 감성 집회만 나갔다 오면 좀 한가 해 질 거야. 그때까지만 부탁해.”

현관문 앞까지 따라 나온 엄마가 잘 갔다 오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깡충깡충 뛰며 손을 흔들어대는 엄마의 모습이 웃겨서 조금 웃다가 아빠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얼른 눈을 피하고 말았다. 아빠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괜히 손톱 끝만 잘근잘근 씹었다. 

집에서 멀어지자 아빠는 말없이 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걸었다.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나는 아빠와 걸음을 맞춰 걷는 대신 조금 더 빨리 걸었다. 함께 걷는 시간이 너무 어색해서 다시 엄마가 있는 집으로 뛰어가고 싶어졌다. 

예전엔 아빠와 걷는 게 참 좋았다. 아빠는 말수가 적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서 같이 있다 보면 나도 덩달아 조곤조곤 말 하게 되고 가만가만 걷게 됐다. 아빠의 희고 큰 손을 잡고 천천히 걷다보면 이 세상이 무척 조용하고 따뜻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다 아빠와 나란히 걷는 나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언젠가 아빠에게 그 말을 했더니 아빠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를 오래 안아주었다. 

이제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아빠와 걷는 게 마냥 편하지 않았다. 나는 누가 나를 알아볼까봐 얼굴을 푹 숙이고 빨리 걸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아빠를 보고 수군거릴까봐 무서웠고 학교 친구라도 나타나 “너희 아빠 남자 좋아한다며?” 할까봐 불안했다. 

아빠는 재작년에 디디 아저씨와 결혼했다. 엄마와 이혼하고 삼년쯤 지났을 때였다. 디디 아저씨는 유명한 상을 여러 번 타서 텔레비전과 잡지에도 종종 나온 사진 작가였다. 디디 아저씨가 아빠와의 결혼을 발표 했을 땐 정말로 화제가 됐다. 뉴스에서도 종일 그 소식이 나왔다. 다들 그 얘기를 떠들어댔고 어딜 가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것 때문에 나는 몇 번씩 전학을 다녀야 했다.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그래도 기억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랐다. 다시는 이사나 전학을 가고 싶지 않았다. 갈 데 없이 떠도는 떠돌이 개처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별이 왔니? 갈비찜 해놨는데 먹을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별 무늬가 촘촘히 박힌 앞치마를 입은 디디 아저씨가 호들갑스럽게 나를 반겼다. 엄마가 선물해준 앞치마는 아저씨한테 아주 잘 어울렸다. 아빠는 가볍게 아저씨를 안아 주고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손을 씻고 아저씨랑 똑같은 앞치마를 입은 아빠가 반찬들을 마저 꺼내 밥상을 차렸다. 달달하고 짭짤한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갈비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갈비찜을 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엄마는 너무 공을 들여야 한다며 질색했다. 밤새 고기 핏물을 빼고 손수 양념을 하고 오래 불 앞에 서서 뒤적거리며 끓이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걸 언제 다 하고 있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내내 서서 아빠랑 같이 음식을 준비했을 디디 아저씨의 그 정성이 부담스러웠다. 

“저 속이 별로 안 좋아서요. 그냥 쉴게요. 고맙습니다.”

나는 국자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디디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 와버렸다. 곧장 문을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맛있는 걸 한다고 아침 내내 아빠랑 같이 분주하게 동동거렸을 디디 아저씨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셋이 둘러 앉아 밥을 먹을 자신이 아직은 없었다. 방 문 밖은 조용했다. 디디 아저씨와 아빠는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시간이 모든 걸 해결 해 줄 거라고 위로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주 오래 전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상처 받은 얼굴로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을까. 차라리 강제로 문을 열고 억지로 끌어내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 하지 말라고 혼을 내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 같았다. 아빠가 다정한 사람이어서 화가 났다. 이 집에서 나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으면 어땠을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무엇도 보고 듣지 못한 것처럼 살면 편해질까. 나는 베개로 뒷머리를 세게 눌렀다. 엄마 말처럼 아빠는 누구든 선택할 수 있고, 누구든 사랑할 수 있었다. 디디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었고 아빠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아빠 말대로, 사는 동안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 큰 행운 같은 거겠지. 그런데 왜 난 때때로 아주 큰 돌덩이에 짓눌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빠랑 디디 아저씨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볼 때마다 쑥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당한 게 아빠 탓은 아니었다. 탓, 이라는 건 잘못의 원인이 아빠에게 있다는 거니까. 아빠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편견이란 건 견고하고도 뾰족해서 부딪힐 때마다 자꾸 새로운 상처를 남긴다. 나는 새로 다니게 된 학교에 아빠와 디디 아저씨의 이야기가 퍼질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아빠와 아저씨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내지 못했다. 나는 베개를 더 세게 눌렀다. 아빠 탓이 아닌 걸 아는데 왜,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걸까. 코와 입이 이불에 파묻혀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 조금, 울고 말았다.


*


“야, 너 또 오줌 참냐? 계집애같이 생긴 게. 너 쌀 때도 앉아서 싸지?”

성호가 민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까불거렸다. 쉬는 시간마다 가만히 있는 법이 없는 성호는 건들거리며 계속 민오를 건드렸다. 반에서 덩치가 제일 큰 성호는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애들을 돌아가며 건드렸는데, 이번에는 민오였다.  

“하, 하지 마.” 

민오가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나자 성호가 “어쭈?”하며 그대로 민오를 밀쳤다. 중심을 잡지 못 한 민오가 나동그라졌다. 일어나려 버둥거리는 민오의 모습을 성호가 우스꽝스럽게 따라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야, 쟤한테 가까이 가지 마. 호모 병 옮는다.”

성호가 야유를 하며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나는 연필을 세게 쥐었다. 책을 펴고 일부러 아무 글자나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호는 얼굴이 하얗고 유독 몸집이 작은 민오를 ‘호모’라고 불렀다. 육학년들 중 그 말뜻을 모르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 성호가 민오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남자애들은 키득거렸고 여자애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정말로 치졸하고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반복해서 했다. 

민오와 성호 주위로 모여 있던 애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민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났지만 붉어진 얼굴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반 애들의 시선이 모이자 성호는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자리로 가 앉으려는 민오의 발을 걸어 다시 넘어뜨렸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의연하게 버텼다. 그런 민오의 얼굴 위로 아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늘 참기만 하고. 바보 같이. 

나는 더 참지 못 하고 일어났다.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애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민오를 부축해 일으키며 성호를 노려봤다. 

“뭐, 뭐야?”

갑작스럽게 내가 끼어들자 당황했는지 성호는 말을 더듬었다. 민오를 함부로 대했던 것과 다르게 성호는 나를 똑바로 보지 못 하고 눈을 피했다.

 딱 한 번, 학교 밖에서 우연히 성호를 본 적이 있었다. 길 한가운데서 자기 아빠한테 맞고 있었다. 성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성호네 아빠는 못된 버릇을 잡아야 한다며 성호의 머리를 계속 때렸다. 그 힘에 뒤로 밀려나던 성호가 결국 가로수에 부딪혀 넘어지자 그제야 어른들 몇 명이 나서 성호 아빠를 말렸다. 덜 맞으려고 잔뜩 몸을 웅크린 성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달아났다. 그 후로 성호는 한 동안 나를 피해 다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때 성호네 아빠가 짓고 있던 표정을 성호가 짓고 있었다. 

“그만 해. 넌 이런 게 재밌어?”

떨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성호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금세 우위를 잡았다는 듯 말투를 바꿔 빈정거렸다. 

“그래, 재밌다. 넌 뭔데 끼어드냐? 아아, 네가 호모 여자 친구야? 근데 호모한테 어떻게 여자 친구가 있을까?”

성호는 빙글빙글 비웃으며 말을 던졌다. 

“그딴 식으로 말 하지 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성호를 밀었다. 방심하고 있던 성호가 “어어”, 하며 비틀거렸다. 애들이 웅성거렸다. “이게!” 하고 성호가 팔을 치켜 올렸다. 나는 지지 않고 똑바로 성호를 노려봤다. 그때 마침 수업종이 울렸다. 다들 재빨리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성호는 한 번 더 팔을 치켜 올려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어휴, 진짜.”하고 중얼거리며 제 뒷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너희 뭐 하고 있어? 자리에 안 앉아?”

선생님이 앞문으로 들어오며 책으로 칠판을 탁탁 쳤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민오가 먼저 쭈뼛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성호도 낮게 욕을 읊조리고는 자리로 가 앉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경고를 들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대로 책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엉켰다. 

우리 아빤, 좋은 사람이었다. 아빠는 작은 동물들도, 연한 이파리를 가진 식물들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 했고,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빠의 뺨을 올려붙였다. 아빠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몇 번을 이사하고 전학 다니면서 나는 아빠에 대해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아빠는 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걷는 법을 익혔다. 왜일까. 뭐가 잘못 된 걸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했다. 아주 큰 소리로 이건 부당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누구를 향해 외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온 사방에 대고 외쳐대도 어디에도 닿지 못 하고 그대로 튕겨 져버릴 것 같았다. 

자꾸 뿌예지는 눈을 세게 비비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놀라 돌아보자 성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담임이 너 데려오래. 아 진짜 뭔 걸음이 그렇게 빠르냐? 짜증나게.”

성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교실에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이 턱까지 차 헉헉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성호를 잠깐 노려보다가 대꾸 없이 그냥 돌아서버렸다.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어 쫓아온 애를 왜 신경 써야 하나 싶었다.

“내 말 안 들려?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네. 네가 이대로 가면 나만 시달린다고.”

성호가 벌컥 소리를 지르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손을 확 뿌리쳤다. 

“건드리지 마. 네 탓 안 할 거니까 들어 가. 괜히 쓸 데 없이 쫓아오지 말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심한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 다시 돌아서 걷는데 성호가 이번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성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 너 내가 우습냐? 그때 봤던 것 때문에 약점 하나 잡았다 생각하나 본데, 웃기지 마. 반 애들한테 말 하려면 말 해. 내가 눈 하나 깜빡 할 것 같아?”

성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온 얼굴에 힘을 하도 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왜일까. 그 순간 바싹 곤두섰던 마음이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성호가 결코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감정 하나를 설핏 엿보고 만 느낌이었다. 바짝 힘을 준 목, 충혈 된 눈, 엷게 떨리는 눈꺼풀. 마주 본 성호의 얼굴엔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거울 속에서 많이 보아 왔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자주 짓게 된 바로 그 표정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없이 서 있다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불쑥 가까이 다가서자 성호는 흠칫 놀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좀 전과 똑같은 거리가 우리 둘 사이에 생겼다. 어쩌면 영영 좁혀지지 않을 거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호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성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박성호. 늦었지만 사과할게. 그 날 그냥 도망쳤던 거.” 

“뭔, 뭔 헛소리야?”

성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듬거릴 정도로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끼어들어도 되나 망설였어. 솔직히 못 본 척 하고 싶었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한 거였어.”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적당히 해. 짜증나게.”

성호는 듣기 싫다는 듯 내 말을 잘라내며 돌아섰다. 나는 그런 성호를 다시 돌려세웠다.

“끝까지 들어. 그 날, 나는 어떻게든 나서서 너희 아빨 말렸어야 돼. 왜냐하면 누구라도 널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게 너희 아빠라고 해도 말이야.” 

이어지는 내 말을 들으며 성호는 붉어진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목 안이 따끔거렸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빤, 남자랑 결혼했어. 디디 아저씨라고, 아주 좋은 사람이야.”

순간 흠칫 놀란 성호가 홱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 말을 학교 운동장 한 복판에서, 그것도 박성호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에게도 하지 못 할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꺼내놓고 보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나는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말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있잖아, 네가 민오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네가 우리 아빠를 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천천히 속엣 말을 이어나갔다. 

“난 비겁해서 민오 편 같은 거 못 들어. 난 그냥 네가 우리 아빠를 욕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을 뿐이야.”

내 말 따윈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가버릴 것 같았던 성호는 의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너야말로 반 애들한테 말 하고 싶으면 말 해. 온 학교에 떠들고 다녀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남을 상처 낸다고 네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숨기려고 애썼던 사실을 털어놓고 나자 도리어 가벼워졌다. 홀가분했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걸 부당하다고 말 하지 못 해서 그토록 답답했다는 걸. 잘못했을 땐 사과해야 하고, 잘못하지 않았을 땐 당당해야 했다. 그게 맞았다. 성호에게 미안하다고 말 하고 나니 모든 것들이 또렷해졌다. 엉망으로 엉켜 있던 것들이 찬찬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할 건 우리가 아니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창피한 짓 하지 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 하고. 진짜 안 따라 와도 돼. 내일 보자, 박성호.”

나는 성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교문까지 곧장 뛰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서 슬쩍 돌아보자 성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성호는 지금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성호도 자기 안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다시 뛰었다. 저 멀리 아빠 집이 보일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갑자기 너무 빨리 내달려 심장이 쿵쿵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는 걸음을 늦추며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저씨, 아직 갈비찜 남아 있죠? 저녁 먹으러 가도 돼요?>

나는 처음으로 디디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연하지! 언제든 환영!>

답은 금방 왔다. 

나는 오늘도 아빠네 집에 간다. 아빠네 집엔 아빠와 디디 아저씨가 산다. 오늘은 셋이 식탁에 둘러 앉아 맛있는 밥을 먹을 거다.  (4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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