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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수 Mar 21. 2023

<이니셰린의 밴시> 이 이야기를 사랑으로 읽을 것

지코 - <사랑이었다>를 함께 들으며

'나'는 언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까?


그 사람이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할 때 등등 많은 대답들이 유효하다. 어느 날 불현듯 사랑을 깨닫기도 한다. 사랑은 확실한 감정이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사랑은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을 잃고 나서야 사랑이었구나를 깨닫기도 한다. 그 순간 사랑은 슬픔과 함께 찾아온다. 그럼에도 그 감정은 사랑이 맞다.


그러므로 <이니셰린의 밴시>를 사랑 이야기로 읽는 것이 옳다.

우정을 끊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내가 너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솔직한 나와 그러지 못한 당신

 야기는 파우릭(콜린 파렐) 콜름(브레단 글리슨) 우정으로 시작한다. 어느  절교 선언을 하는 콜름에게 파우릭은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모호할 뿐이다. 콜름의 질문은 집요하고, 파우릭의 회피는 한결같다.  과정에서 파우릭의 행동은 충동적이고 유아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정들은 모두 솔직하다.  콜름의 태도는 결코 솔직하지 못하다.  주인공의 서로 다른 태도에서  영화를 사랑 이야기로 읽을 가능성이 생긴다.


콜름은 어쩌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바로 사랑을 부정하는 거짓말이다. 콜름은 고해성사 중 신부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는다. 남자에게도 불순한 마음(욕망의 형태로써의 사랑)을 느끼는지. 그 질문을 듣고 콜름은 크게 분노하고 화를 내고 부정한다. 콜름의 태도는 신부와의 큰 언쟁으로까지 번진다.


강렬한 부정은 종종 긍정인 경우가 있다. 콜름은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그 장면만으로는 아직 확정을 짓기 어렵다. 우리는 콜름의 다음 거짓말을 살펴봐야 한다. 콜름은 바이올린 연주자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이올린을 위해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콜름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다. 다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게.


상처 난 것들을 보여주면서
치유받길 거절하는 널 보며
내가 할 게 못 되는구나 힘들다

지코-<사랑이었다>에서


연민의 다른 이름

어떤 사랑은 상대에게 동정과 연민을 바란다. 나는 그걸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픈 사람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연약하고 아프다. 우리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 모습이 못되게 보일 수는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앞에서 무기력을 느끼는 것은 꽤나 비참한 일이니까. 그 무기력이 비참한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상대의 태도 때문이다.


지코의 노랫말처럼 콜름은 '상처 난 것들(잘린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치유받길(화해의 대화)'를 거절한다. 콜름의 육체적 고통은 파우릭의 정신적 고통으로 치환된다. 파우릭은 절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 모습을 우정으로 읽게 되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사랑으로 읽게 된다면 그 모든 행동이 이토록 쉽게 이해가 된다. 같은 문장을 다시 써서 말해본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는 더 사랑하고, 누군가는 덜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다. 과연 콜름과 파우릭 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대답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알 수 있다.


나답지 않던 말과 행동이
멋대로 굴고 있는 심장이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결국엔 사랑이었다

영화 속 한 노파는 저주이자 예언을 내린다. 마을에 두 개의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나의 죽음은 영화의 끝에 등장한다. 남은 죽음이 누구의 몫인지는 영화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지코의 노랫말을 재인용해서 사랑의 정의를 '나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답은 명확하다.


콜름의 모든 행동은 파우릭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콜름은 자신이 파우릭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파우릭을 지워내려 한다. 모든 사랑의 형태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시대이고, 보수적이며 종교적인 작은 섬마을에서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콜름은 포기한다.


심지어 최후의 순간에 콜름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구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버리고, 자신의 평생인 음악도 버린 콜름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못한다.


파우릭에게는 사랑이 전부였다. 파우릭에게 만큼은 사랑이 '나 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족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우정이라 믿었던 사랑이 파우릭 자신보다 중요하고 지키고 싶은 것이다. 파우릭은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아프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했다. 그래서 파우릭은 자신을 향한 마을 경찰관의 폭력이 무섭지 않았다.


콜름에게는 반려 동물이 남았고 집은 불타서 사라졌으며 다시는 연주를 할 수 없다. 파우릭의 반려 동물은 죽었고 가족은 떠났다. 그리고 집이 있지만 그 안에서 파우릭은 혼자다. 본국에서 찾을 수 있는 일자리도 파우릭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콜름과 파우릭의 모든 상황은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그리고 하나의 죽음이 남아있다.  그 죽음은 더 사랑하는, 아니 어쩌면 더 사랑했던 사람의 몫이다.


이 영화는 콜름과 파우릭의 사랑 이야기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의 우선순위가 달랐다.

나보다 사랑이 먼저인 사람과 사랑보다 내가 우선인 사람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은 아프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지코의 <사랑이었다>를 들으며 확신을 해본다.

이 이야기는 분명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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