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과 산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딩 피플 Jun 22. 2018

사랑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첫사랑 - 이반 투르게네프


순진한 열여섯 살 소년의 옆집에 몰락한 공작가의 딸 지나이다가 이사 온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듯이, 사랑의 크기에 나이는 상관없었다. 전에 없을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지나이다의 마력에 소년은 정신을 잃는다. 마치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양자역학처럼 모든 것의 이름이 지나이다가 된다. 그 거대한 인력 앞에서 소년은 힘없이 공전을 계속한다.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첫사랑을 빼앗긴다. 그가 경외해 마지않던 아버지에게.


소설 <첫사랑>은 특별한 사건이나 흥미로운 줄거리가 아니라, 작가 특유의 스타일과 세계관에 가치가 있다. 초조한 마음 같은 건 아랑 곳 하지 않는 불확실한 사랑, 확신할 수 없는 주관의 세계에서 시험받는 오만한 인간을 그려내는 것,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을 인간적인 소설의 전형으로 만든다. 투르게네프는 기본적인 설명들을 마음껏 생략하면서 사랑까지도 객관적으로 그려내려는 여타 시도들을 조롱한다. 동시에, 첫사랑을 맞닥뜨린 자 특유의 불안한 시선, 첫사랑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주인공은 첫사랑에게 실제 이상으로 도덕적, 형이상학적 의미들을 부여한다. 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지나이다의 묘사는 때로는 천사 같고 때로는 악마 같아 종잡을 수 없다. 소년이 집요하게 관찰하는 지나이다는 그에게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지나이다의 본질은 몰락한 가문의 천박한 여자에 지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각색을 거친 머릿속 세상에서는 근거 없이 우월한 존재다. 세계는 오로지 지나이다를 위해 존재한다. 그는 지나이다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한다. 소년은 객관성 따위에는 미련이 없다.


지나이다 이외의 모든 것이 해체 혹은 해제된 소년의 동공에는 그녀 말고는 상이 맺히지 않는다. 그 외의 것들은 언제나 멈출 새도 없이 가설의 형태로 스쳐 지나간다. 지나이다에게 눈길이 닿는 순간, 모든 사유는 소멸한다. 소년은 그녀가 아버지와 만날 거란 생각을 그 많은 단서에도 불구하고 꿈에서야 간신히 떠올린다. 지나이다의 영구적인 완벽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년은 계속해서 외면과 집착 같은 편협한 행동만을 반복한다. 그러나 시야에서 벗어난 사각 속에, 자신도 몰랐던 질투 아닌 질투의 그림자가, 불가해한 욕망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의 바르게 포장된 비가시의 영역은 인물들의 지나이다 숭배와 무한히 충돌하며 이중성을 드러낸다. 변덕과 독립심의 협주는 자기반성의 날카로운 칼날을 무디게 했고 모든 당위와 이론을 무력화시켰다. 원래 추상화와 같이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한 묘사는 그것을 그린 인간이 서 있던 자리를 알 수 없는 법이다. 고결하거나 부유함을 뽐내던 자들 역시 이 거센 공전축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스스로 권위와 권력을 내려놓는다. 허용된 것은 의지뿐이다. 사랑에 대한 추동, 평소에는 다른 것들에 가려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던 그 광기 비슷한 것만이 남는다. 완벽한 지나이다와 주인공의 아버지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지나이다는 첫사랑이 아니라 두 번째 사랑부터 시작해야 했었다.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어머니인 가난한 공작부인의 종용에 남자들을 유혹해야 했던 지나이다와 열 살 연상의 여자와 마음 없는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에게 첫사랑은 없었다. 처음부터 능숙해야만 했던 둘은 비록 사랑과 탐닉 사이의 구분이 어려워진 순간에도 이제 와서 풋내기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그 길의 끝이 마조히즘이더라도 말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마지막 애정을 담아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거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 “라고 편지를 보낸 이유다.


그들의 사랑 앞에서 갓 첫사랑을 시작한 열여섯 살의 소년이 멀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질투를 잊을 만큼의 동요, 이해할 수 없는 열정에 대한 경외감을 이겨내야 비로소 소년의 풋사랑도 아물 것이다. 아마 그 순간을 성장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첫사랑이란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하는 무엇인가다. 주인공에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첫사랑의 기억보다, 첫사랑의 시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얼마 없을 것이다. 소년의 첫사랑은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기에 더 놓기 어렵다.


투르게네프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는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첫사랑>을 쓰던 시기,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90퍼센트였다. 이건 심지어 완전문맹 수치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10%조차도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 추측하기는 어렵다. 즉 러시아어로 문학을 해봤자 읽어줄 사람이 없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투르게네프는 소설을 썼다. 그는 그저 첫사랑을 얘기하기 위해 확률이 10%도 안 되는 도박에 승부를 걸었다.


<첫사랑>은 기적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어쩌면 투르게네프는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첫사랑>이란 소설이나, 첫사랑의 진심이 전멸하지 않고 0.1 퍼센트라도 전해진다면 이긴 싸움이란 것을. 사실 소설이나 사랑은 절망적인 상황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도 그 둘은 언제나 이겨왔고, 이어져서 우리의 눈앞에 당도할 것이라는 것을.



서평 <이상민 / 리플 정회원>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책을 읽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