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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Jun 01. 2022

짧지만 넉넉했던 우리의 밤

나의 휴학편지 2호

02


"‘지금’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에 흔쾌히 마음을 내어보자."



 어느 5월 끝자락 오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참이었다. 빌린 소설책 두 권과 전공 관련 책 한 권을 내 품에 안은 채 조용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었다. 그때 휴대폰에 벨소리가 울렸고 발신인은 엄마였다. 그녀는 대뜸 오늘 밤에 바다에 가지 않겠냐며 나를 유혹했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와 나는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즈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그 시간대에는 빛이 예쁘다. 밝은색이 점차 진한 오렌지빛에 가까운 망고빛으로 변하다가 따뜻한 분홍색으로 물드는 그 시간. 곧 푸른 밤으로 모습을 바꾸어 낼 그 해질녘. 도로 양옆으로 큼직한 산들이 넉넉한 빛을 받는 양을 보니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영화 ONCE에 나온 곡이 흘러나왔는데 엄마와 나는 동시에 ‘아-‘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더구나 며칠 전에 우연히 꺼내 듣고 좋아했는데 이렇게 또 같이 나누다니… 곡이 더 깊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뜬금없이 요즘 엄마의 고민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에 조금 놀랐는데,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50대 초반을 넘기고 있는 그녀의 감정을 나는 모르고, 어떤 삶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 어린 나로서는 짚어보기 어렵다. 대부분 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세계를 어렴풋이 상상해볼 뿐이었는데, 더 넓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게는 생경하게 다가온 부분이었다. 아직은 나의 단계가 아닌 종류의 고민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언젠가는 나도 그런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낯설었다. 동시에 차근차근 풀어가고 있는 엄마를 보며 작은 힘을 받았다. 다가올 시간에 미리 안부를 보내는 인사.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어느덧 어둠이 내린 포항 바다에 도착했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마음 놓고 밤의 길이를 늘리고 있었다. 플랫슈즈를 벗고 해변을 걷는데 맨발을 감싸는 모래가 참 고왔다. 마치 매끈한 지점토를 밟는 듯했다. 낮은 계단에 걸터 앉아 바라본 바다는 편안한 감정을 건네주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늘 그 자리에 있어 마음이 놓이는 바다. 해변을 마주한 거리에는 사람들로 수선스러운 식당이 즐비했고, 우리는 그나마 조용한 초밥집을 찾아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오니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버스킹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그 틈에 끼여 듣다가, 우리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싶은 간질간질한 마음에 근처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옛날 90년대 노래부터 최근 노래까지 모조리 섭렵하고 나오니 벌써 시간은 11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아까보다 차분해진 밤바다를 바라보던 우리는 슬슬 졸리기도 하고 내일 일출을 보자며 급 차박을 결정해버렸다. 해변이 보이는 곳에 주차를 하고 시트를 뒤로 눕히니 잘만한 공간이 나왔다. 포근한 담요 대신 그럭저럭 덮고 잘만한 얇은 것을 덮고, 그렇게 예고 없이 내 인생 첫 차박을 엄마와 함께했다. 잠을 두어 번은 깰 만큼 좁은 자리는 불편했지만 그 위로 얌전한 파도 소리가 덮이니 그게 또 낭만이었다. 낭만 있는 밤이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즉흥 여행이 이토록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는 순간에 오롯이 빠져들고, ‘지금’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에 흔쾌히 마음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과 함께라는 사실도. 삶은 다분히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어떻게 방향키를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길을 삐뚤빼뚤, 그러나 달달하고 어쩌면 단순하게 항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마음에 끌리는 방향대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하룻밤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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