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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Jul 26. 2022

담백한 걸음

나의 휴학 편지 4호

04


"긴 여행일수록 천천히 걷고, 흐름을 느끼고, 푸근한 공기에 자기를 맡길 줄 알아야 해."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차분하면서 적당한 소음으로 얇게 싸인 이곳에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다. 모두 자기만의 취향을 담은 옷을 입은 그들 앞에는 예쁜 잔이 하나씩 놓여 있다. 둥글고 새하얀 커피잔, 투명한 유리 사이로 얼음이 비치는 컵, 손바닥보다 더 작은 에스프레소 잔. 어떤 테이블 위에는 누군가의 생각이 빼곡히 쓰여있을 노트가, 또 다른 테이블에는 긴 곱슬머리의 여자가 작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고 수줍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두 친구가 있고, 이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는 연인이 있다. 그러한 지금의 공기를 더 생생하게 만드는 여름날의 햇빛이 네모난 창을 비집고 들어온다. 창밖에는 맑은 하늘과 부드럽게 흔들리는 초록 잎이 그득하다. 적은 수의 자동차도 지나가고 느리게, 혹은 서둘러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스쳐간다. 


방금 보고 나온 전시 책자를 다시금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에 줄을 긋고 메모한다. 평소에 마시지 않는 카푸치노 한 잔을 앞에 두고서. 시간의 여유는 일상에서도 흔했지만 이러한 마음의 여유는 드물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내가 이런 것을 원하고 있었구나. 놓치고 있었던 마음을 찾아낸 듯했다. 근래의 나는 비어있지만 가득 찬 상태로,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상태로 걸어왔던 게 아닐까 싶다. 시끄러운 마음 한구석을 데리고서 말이다. 긴 여행일수록 천천히 걷고, 흐름을 느끼고, 푸근한 공기에 자기를 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내가 믿는 방식이고 가장 나다우니까. 우리는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을 때 행동과 표정이 자연스러워진다. 스스로 고른 나날이 흘러가며 가장 나답게 쌓이도록, 그렇게 담백하게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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