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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Mar 08. 2023

촌스럽게 굴지 맙시다

나도 맥주 맛 알거든요

얼마 전 기대감에 부풀어 방문한 맥주 가게에서 실망스러운 경험을 했다. 친구와 찾은 곳이었는데, 둘 다 사워 비어를 주문했고, 별다른 코멘트 없이 맥주를 받았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없었다. 우리끼리 알아서 맥주를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다만, 우리 다음에 들어온 손님들이 문제였다.


두 남성이었고, 그중 한 명이 맥주의 역사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고, 맥주 가게에는 뭐가 어째야 하고 어째야 한다는 얘기를 같이 온 사람에게 읊고 있었다. 맛에 대한 이야기였으면, 경청했을지 모른다. 듣기에도 그냥 아는 척하느라 늘어놓는 지식의 향연이었기 때문에 언짢았던 터였다. 그런데 가게 직원분이 우리가 마시고 있는 맥주와 같은 맥주를 서빙하며, "천천히 마실수록 맛있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한텐 그런 말을 안 했는데!

순간 배신감에 휩싸였다. 물론, 알고 있다. 사워 비어는 차게 마실 때보다 손으로 온도를 높여서 마실 때 더 풍미가 풍부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하지만 배신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든 배신감은 '우리가 여자라고 맥주 맛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였다. 좀 아는 척하는 남성 손님에게는 다른 접객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술김에 느낀 불쾌함일 수 있다만, 기분이 확 나빠져서 얼른 잔을 비우고 평소에 가던 맥주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나빠졌던 것엔 무수히 많은 역사가 있으리라. 여자라서 술의 맛을 잘 모른다는, 여자라면 단 맛의 술을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을 접해왔기 때문에 사실은 별 거 아닌 것에 분노 버튼이 눌린 것일지도 모른다(아니, 여자는 미뢰가 없어? 후각이 없어? 섬세한 맛을 음미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화가 난다). 뭐, 우리에게 서빙할 땐 바빠서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남성 손님 둘과 우리의 유일한 차이점은 성별이었으며, 그쪽은 아는 척을 엄청나게 한다는 점뿐이었다. (아차차, 우리도 맥주에 대해 왈가왈부를 했어야 하나?)


언젠가 반드시 글감으로 써먹으리라 싶었던 기사를 여성의 날인 오늘, 풀어보는 게 시의적절할 것 같다. 여러 문명권에서 고대 신화 속 맥주의 신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과 홉을 활용해서 맥주를 만든 것도 한 수녀에서 시작됐던 점을 언젠가는 소개하고 싶었다. 다만, 산업화를 거치며 대량 생산을 하며 물리적인 체력이 요구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여성은 이 양조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맥주는 남성의 술이 되었다.

*참고 기사: 여성 신문


술에 있어서 마니아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특히 여성의 존재감이 단순해지는 것 같다. 술의 맛을 음미하고, 본인만의 취향이 뚜렷한 여성 소비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고 과일 맛이 나는 술만이 여성의 선택을 받는다는 단순하고 촌스러운 편견이 쉽게 가시지 않는 듯하다. 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건 마치 본인들만 가능한 것처럼 군다. 재수 없어, 진짜... 뭐든 자기들이 하는 게 진짜고, 여성들이 하는 건 가짜로 취급하는 게 너무 촌스럽다.


촌스럽게 굴지 맙시다. 2023년입니다!


덧 1) 국내 여성 양조사도 정말 드물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여성 양조사가 늘고 있는 추세인 듯하다.

*참고 기사 : 플레이그라운드 매거진


덧 2) 자주 가는 맥주 가게에도 여성 직원이 입사했다! 티는 못 냈지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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