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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Oct 06. 2024

어디로든 떠날 것

여행의 수확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날씨, 사람, 교통 등에 지레 겁먹고 긴장하고, 실제로 적응하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은 꼭 해외 여행을 가야 해!’ 파는 아니다. 게다가 여행에서 느끼는 즐거움보다 페스티벌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양적으로 크기 때문에 나에게 여행은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정도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어쩌다 계모임처럼 매월 돈을 모으는 친구 모임에서 올해 추석 연휴 때 스페인에 가기로 해서 가게 됐다. 아주 적극적이진 않았으므로 ‘가게 됐다'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어쩌다 떠난 스페인 여행을 통해 여행을 사랑하게 됐다는 결론으로 끝나진 않으니 그리 뻔한 글은 아니다. 스페인에 다녀온 후인 지금도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여행이 나에게 꽤 타이밍 좋은 환기가 됐다는 걸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침 그때 집 어딘가에서 잠들어있던 휴대용 수채화 물감 세트를 발견해 이것저것 그리고 있었다. 준비물도 다 있겠다, 스페인 가서 그림이나 그려볼까 싶어 일단 챙기고, 어반 드로잉을 포기한 지가 몇 년이 되었으므로 비행기에서 어반 드로잉 책을 보며 벼락치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책을 보며 나무, 구름, 컵 등의 표현법을 익히며 생각보다 잘 그려진다는 사실에 남몰래 기뻐했다.


그러고는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어딘가의 카페 야외석에 앉아 놀이터를, 시차 적응 실패로 잠이 안 오는 새벽엔 전날 먹은 음식을, 카페에서 쉬면서 방금 보고 온 구엘 공원의 건물을 그렸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는 감각이 좋았다.


사실 몇 년 전 스페인에 왔을 때도 어반 드로잉을 시도했지만, 너무 못 그리는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 포기해 버렸던 전적이 있다. 그런 내가 이제 선을 잘못 그었든, 비율을 잘못 잡았든 간에 어떻게든 종이 한 장을 책임졌다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릴 때마다 사람들이 하트를 많이 눌러주는 것도 짜릿한 동기부여가 됐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효능감이 계속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예상하지 못한 여행에서의 수확이랄까.

반면 예상은 했지만, 하고 나니 훨씬 더 좋았던 수확도 있다. 바로 ‘휴식의 종결' 효과. 퇴사했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디 가까운 데라도 갔다 오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귓등으로 들었다. 돈을 아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예쁘게 꾸며놓은 집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는 없다! 게다가 9월에 큰 여행을 앞두고 있으니 여행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스페인 다녀오면 그때부터 본격 취준을 하자라며 스페인 여행을 하나의 기점으로 생각하고, 그전까지는 탱자탱자 놀기에 바빴다.


이제 이 여행이 끝나면 휴식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니, 문어 요리, 하몽, 까바 등 가격 걱정 크게 안 하면서 맛있는 건 다 먹고, 가우디의 아름다운 건축물도 눈에 담고, 무박으로 이비자도 다녀오며 원 없이 놀게 되더라.


사회복지나 심리 상담 분야에서 “종결"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다. 클라이언트에게 더이상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아도 될 때, 사회복지사나 상담사는 종결로 처리한다. 그렇게 다녀오니, 이제 나에게 휴식은 더이상 제공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납득했다.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시점이다. 그러니까 이번 스페인 여행은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가 아닌, ‘다 놀았니? 이제 할 일을 하자'인 셈.


다녀온 직후에 바로 공고를 찾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뒤엎고, 서류를 내보고 있는 요즘이다. 이 시간이 정말 험난하겠지? 두렵지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 나를 기특해하며 이 글을 우선 썼다. 떨떠름해하면서 떠난 여행으로, 나에게 여행의 의미가 이젠 즐거움보다도 환기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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