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자주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 SNS로 보이는 근황만 알고 지내는 지인들, 가끔 명절이나 생일에 근황을 묻던 전 동료들에게 내 상황을 알리는 게 싫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을 쉬게 된 것에 대한 히스토리를 말하는 것도 지쳤고, 혹시나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이 일을 담백하게 받아들인 척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버거웠다. 더운 날씨를 핑계로 나의 안락한 집에서, 동네 도서관에서, 때로는 공연장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자주 만나진 않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가까운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하길 꺼리는 내 모습에 놀랐는데, 오히려 지인에게 연락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 카톡 창 앞에서 주저했다. 아마도 이 다정한 친구들은 나를 가여워하며 진심으로 응원해 줄 테지. 하지만 그땐 그 다정함도 버겁게 느껴졌다. 한 번은 전 직장에서 내가 잘 따르던 선임이 안부 카톡을 보내왔고, 미리 보인 카톡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며 떨어지기도 했다.
새롭게 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머리 한켠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내가 일을 구하고 있음을 알리면 뭐라도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안 하면 사람들로부터 이대로 콘텐츠 기획자로서의 내가 영영 잊힐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었다.
고립되고 싶은 마음의 기저에는 일을 곧 사람의 가치라고 받아들이고 있던, 나의 편협한 관점이 깔려있었다. 더 자세히 고백하자면, 내로라하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나 본인 일에 자부심을 가지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늘 동경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고. 하지만 이제 일 자체가 사라졌고 내 존재 가치도 덩달아 증발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 더욱 작아졌다. 남들로부터 받는 평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휘두르던 채찍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런 내 모습을 나에게 들켜버리는 것도 꽤나 괴로웠다. 삶의 무게추를 일에 과도하게 놓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게 내 삶에 도움 될 때도 있지만, 날 괴롭히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달까.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에 대한 이야기들에 ‘아니, 근데'라는 반론을 떠올리게 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을 즐기면서 해야 한다'는 문장에는 ‘일은 즐기지 않아도, 몰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경계하며 일 외에 무게추를 두는 삶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일과 삶 간의 시간 비중, 그러니까 “워라벨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 나를 구성하는 여러 자아 중 ‘일하는 나'에게 너무 높은 점수 비중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것에 가깝다. 비록 지금 일을 하고 있진 않지만, ‘독립한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살림을 잘 해내고 있고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평소 어려워하던 음악 장르 공연에도 용감하게 갔다 왔고 ‘시민'으로서의 나는 비영리기관의 자원활동도 했다. 이 자아들에 더 많은 퍼센트를 줘야만 나라는 사람이 더 쪼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또 다짐 같은 글을 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