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들이 아닌 집들이
-오늘 술 한 잔 먹고 간다.
“어? 누구랑?”
-이야기했잖아. 전기 해준 우리 부장이랑, 공구 빌려준 주임이랑.
“아.. 그게 오늘이야?”
-어. 너거 학원에서 문 잠가놓고 마신디.
“그냥 술집으로 가지?
-다 궁금하다 안하나.
“아니,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술 먹을 만큼 분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러저러한 사고들 끝에 드디어 교습소를 오픈했다. 부채꼴 모양의 일곱평 남짓한 공간은 출입문만 열어도 모든 공간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초록색 창문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걸 페인트를 칠하네, 시트지를 바르네 온갖 소리를 다 했지만, 신랑에겐 그럴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에너지 드링크며, 피로회복제며, 파스 등 각종 약빨로 겨우겨우 창을 뜯어 청소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오픈 날짜를 미리 정해 둔 게 신의 한 수였다고나 할까?
인테리어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굳이 고향까지 찾아가 우리의 결혼날짜를 잡아준 철학관엘 갔다. (신랑은 공사 중, 나만 갔다.) 말 많은 사주쟁이의 온갖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신랑이 셀프로 인테리어를 해 본다고 하는데 시켜도 될까요?”
푸념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사주쟁이는 대뜸.
“그 집 신랑은 시작은 거창한데, 끝을 못 낸다. 그 자리에서 오래 할 거면 돈 좀 주고 맡기고, 오래 안 할 거면 돈 작게 주는 데다 맡기고. 근데 그 고집은 못 꺾겠는데…”
사주쟁이는 흐리는 말끝에 뭐든 다 안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화장실 공사는 멋들어지게 해 놓고, 이사 나오는 그날까지 얼룩덜룩 미완성인 채 남아있었던 신혼집의 방문이 떠올랐다. 흰색 시트지를 붙이다 아직까지 문짝 두 개쯤 남은 지금 집 붙박이장도 있구나. 미처 끝내지 못한 자잘한 내역들이 하나씩 곱씹듯 떠올랐다. 하얀 한지에 적어 준 개업 날짜를 전하며 신랑에게 그 말도 전했다.
“니는 끝을 못 본단다. 그냥 업체 불러서 맡기자.”
사주쟁이의 그 웃음 탓이었을까? 신랑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나의 교실은 나름 무사히 개업식을 마쳤다. 옆의 가게들에 개업 떡을 돌리고, 부모님들 모시고 밥 한 끼 한 게 다인 간소한 개업식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개업식을 하고 아직 첫 상담도 안 한 곳에서 신랑은 본인의 지인들과 개업식을 하겠단다. 나는 고생한 신랑네 부장에게 사례비를 드리자고 설득했지만, 설득당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그렇게 학습 공간에서 음주파티가 열렸다! 안주를 배달시키고, 길 건너 편의점에서 술을 잔뜩 사고. 문서작업용으로 가져다 놓은 컴퓨터로 노래도 틀었겠지.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오는 신랑은 언제나 꼴뵈기 싫다.
“잘 놀았나?”
“어, 마누라~ 잘 놀았지.”
“그럼 들어가서 자라.”
“있지 여기 좀 앉아봐.”
술이 취하긴 취했다. 혀도 짧아진걸 보니. 술에 취해 횡설수설 오늘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본인의 고생담을 이야기하고, 지인들은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고 그런 분위기의 술자리였나 보다.
“내가, 어, 다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었는 줄 아나! 그 사주쟁이가 그딴 말만 안 했어도, 내가 그 말 다 엎어버리려고 진짜 이 악물고 했디. 잘했제?”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지 딴에도 끝 못 본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나 보다. 하긴 저의 40년 인생 통틀어서 완벽한 끝을 본 게 몇 번 되지 않으니.
“내가 내 운명을 바꾼거디.”
뭘 또 저렇게 거창하기까지. 고개가 점점 떨어지는 걸 보니 술주정은 끝났는가. 벗긴 양말을 세탁실에 넣어 두러 간다.
“마누라, 있지~ 코로나 심해져서 또 영업금지 이런 거 하면 ‘지혜교실’에서 또 술 한 잔 할꺼디.”
“미쳤네.”
“야, 내가 만들었는데 그것도 못하나! 응? 내가 땀 삐질삐질 흘리고 잠도 안 자고 어, 주말 몇 개를 거기다가 다 쏟았는데. 내 지분도 쫌 있어야 되지 않나?”
술 마신 자와의 말이 길어지면 내 정신 건강에 해롭다. 지가 안 자면 내가 자러 가는 거다.
“그래 공사한다고 수고했다. 일단 나는 잘게. 내일 봐.”
열심히 해줘 봐야 이놈의 마누라는 리액션이 없다며 매번 하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신랑도 잠들어 갔다.
-이거 학원에 한 개 놓을까?
신랑의 카톡 메시지에는 빔프로젝트 링크가 걸려있다.
-필요 없는데
-왜? 애들이랑 영화보고 토론하기 뭐 이런 거도 해야지. 다른 데는 다 하드만
-니가 사준 21인치 모니터로도 충분하거든
지난주에는 소형 냉장고 링크를 보냈다. 그 전전주에는 암체어를 이야기했지. 그러고 오늘은 빔프로젝터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그게 있어봐야 누가 쓰겠는가.
-오늘은 상담 없나? 학생수는 좀 늘었나?
-웬 관심?
-빨리 돈 벌어서 사거리 큰 데로 이전하자.
이렇게 대놓고 탐을 내면 기가 차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교습소는 순항 중이다. 초보원장의 깜냥에 적당한 학생 수, 다섯 살 아이 엄마의 생활패턴을 크게 해치지 않는 근무시간. 적게나마 들어오는 교육비는 차곡차곡 통장에 쌓인다.(빚을 갚아야 한다) 나는 이 생활을 조금 길게 할 생각이다. 월세 없는 가게에서 느긋하게 내 자리를 찾아갈 생각이다. 그러는 동안에 신랑은 이 공간을 탐내 애가 타겠지만 말이다. 내가 호락호락 뺏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