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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 쓰다

목욕

211216

by 지야

수도 꼭지를 돌린다. 콸콸콸 큰 소리를 내며 욕조에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린다. 하얀 김이 닦아 놓은 거울을 뿌옇게 흐린다. 일단 문을 닫고 나온다. 물 속에 바로 들어가도 될 일이지만, 오늘은 세팅을 좀 한다. 뜨뜻한 물에 좀 오래 잠겨 있어야 한다. 며칠 전 잠결에 켠 기지개 탓에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악하고 소리지르며 깼는데 여전히 딴딴해서 좀 풀어줘야 겠다. 뭉친 근육엔 뜨거운 물 만한게 없지.


유달리 몸 움직이는 것에 소질이 없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운동회, 체육대회였다. 대학가서 좋을 것 중 하나가 더 이상 체육대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웬걸. 정원 15명인 학과에서 열외는 없었다. '저는 운동화가 없어서요.'라고 하던 편입생에게는 운동화를 빌려서 신기는 게 나의 선배들이었다. 그러니 운동화도 있겠다. 일학년이겠다.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이럴 땐 능력치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종목을 잽싸게 차고 앉는 것이 상책이다. 이를테면 큰줄넘기의 줄돌리는 사람 같은거.

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는 곡소리가 난다. 무릎, 허리, 어깨, 손목 모두가 비명을 질러댄다. 슬쩍 눈을 떠보니 아직 5시반이다. 속옷을 갈아입고, 샴푸와 비누만 챙겨들고 목욕탕으로 간다. 평일 새벽 여탕은 조용하다. 말린 쑥이 들어 있는 내 몸집만한 자루가 물에 둥둥 떠다닌다. 쑥 근처에도 안가는 나지만 물에 우러나고 있는 이 쑥은 좋다. 혼자 큰 탕에 들어가 앉았지만, 뜨거운 물을 더 튼다. 노골노골하게 풀리는 근육들이 신났다. 씁쓰무리한 쑥향에 기분이 가벼워진다. 내년에는 체육대회날은 집에 가버려야지.


패드에 쇼프로그램을 하나 틀어 변기 뚜껑 위에 올려 놓고 막 우린 차를 보온병에 가득 담아 욕조 끄트머리에 놓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품 비누도 풀고 소금 입욕제도 넣어보고 했는데 이제는 만사 귀찮다. 뒷정리에 손이 많이 가는 것은 하지 않는다. 아이와 생활하면서 얻게 된 지혜이다. 훈훈한 수증기가 겨울이라 더 뿌옇다. 발 끝을 살짝 물에 담근다. 물 온도가 시원찮다. 아이가 뜨거워한다고 보일러 온수 온도를 낮춰 놓더니!!!!! 자리에 없는 신랑에게 화가 난다.


신혼집이었던 30년 더 된 18평 아파트는 여러 가지가 불편했지만, 단 하나 뜨거운 물을 틀면 바로 나오는 것이 정말 좋았다. 제철소 용광로에서 막 나온 쇠덩어리를 제련하기 위해, 쇠덩어리 아래에 파이프를 따라 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데, 그 냉각수를 주택단지의 난방용으로 사용했다. 보일러 배관 밸브를 다 열어 두면 시골집 아랫목 마냥 뜨거워져서 반의 반만 열어 두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신랑이 고쳤다는 작은 욕실에는 욕조가 없었다. 일년을 투덜 냈더니 어느 날 욕조를 만들어 줬다. 요즘 유행하는 조적식 욕조.

델 것 같은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곳이라 타일의 찬 기운이 없으면 들어앉아 있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적당하게 식어서 따땃한 물 속에 목만 내고 앉았으려면 말랑말랑해지는 근육만큼이나 머리 속도 말랑말랑 해졌다. 일하러 다니느라 맘껏 쓰지 못했던 그 욕조를 한참 그리워했다. 뜨거운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물 속에 누워 있으려니 또 생각이 난다.


뜨거운 물을 좀 더 틀어서 물의 온도를 더 높인다. 쇼프로그램 속에 출연자들의 웃음소리가 욕실 벽에 울려 과장되게 들린다. 내 웃음 소리는 아니지만 남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슬몃 입꼬리가 움직인다. 그래도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물 속에 앉아 있을 수 있으니 됐다. 간난쟁이를 키우던, 머리 감을 10분이 없던 날들이 떠오르니 모든 게 용서된다. 기준이 이렇게까지 낮아질 일인가. 깔깔 거리는 웃음들 사이로 허탈한 내 웃음 소리가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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