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번째 ©Myeongjae Lee
BX8010, A321-200
16:15, 탑승구 10, 좌석 25A
"저도 원래는 좀 행복을 수능 점수표처럼 생각했었어요. 남들이 줄 세워 놓은 표를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음, 난 어디쯤인가? 난 어디 껴야 되나?'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봐도 답이 없더라고요. 뭐, 어차피 답도 없는 거 거기 줄은 서서 뭐 해요? '오케이, 그건 너희들 기준이고', '내 점수는 내가 매기면서 산다' 하고 살아요. 뭐, 남들 보기야 어떻든 나 보기에만 행복하면 됐죠, 뭐." <동백꽃 필 무렵> 19화, 동백이.
막상 집에 오니, 돌아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토요일 내내 틈이 날 때마다 제주도닷컴 홈페이지와 8개 항공사 앱을 수 십 차례 들락날락했지만, 16:15 이후 항공권은 구할 수 없었다.
제주에 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는 날도 종종 있다.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비행기 안에서부터 고기가 먹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고깃집에 가서 직원이 직접 구워주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었다. (서귀포에는 고기를 직접 구워주는 음식점들이 종종 있다.)
토요일 밤, 식구들과 올레시장 근처 고깃집에 가서 양념목살갈비, 생갈비, 갈매기살을 종류별로 먹었다. 나는 흰쌀밥과 함께 고기를 먹을 때가 그냥 고기만 먹을 때보다 만족감이 훨씬 더 높아서, 고기를 굽기 시작할 때부터 늘 공깃밥을 주문하는데, 가끔씩은 '고기를 덜 먹기 위한 작전'으로 오해를 받을까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뭐, 동백이 말처럼 남들 보기 어떻든 나만 좋으면 되는 거지.
바퀴벌레를 피해 거실에서 자던 둘째가, 새벽부터 안방과 부엌을 오가며 떠드는 아빠엄마의 잡담 소리에 일찍 깼다. 같이 산책 가자 꼬셨다.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바퀴벌레가 정말 무서웠나 보다. 그래서 옷도 종류별로 안방에 모셔 놓은 듯하다. 살짝 웃음이 터졌는데, 얼른 주워 담았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바퀴벌레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게 되어 몹시 미안했다. 침대도 완전히 빼보고, 긴 자로 여기저기 구석구석 확인도 해보고 했지만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약 먹고 어디서 죽었거나 방을 이미 탈출한 모양이라고 둘째를 안심시켰다. 오늘 하루만 더 거실에서 자고 다음 날부터는 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다행이다.
어, 어, 하다가 공항에 갈 시간이 되어버렸다. 아내가 차로 급행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서프라이즈! 나를 내려준 뒤 코너를 돌다가 골목에 차 세울 자리가 있어서 적당히 주차해 놓고 왔단다. 아, 좋다. 함께 예쁜 하늘도 보고, 하늘 사진도 찍고, 못다 한 이야기도 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보다는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시간은 확실히 상대적인 것 같다. 애정하는 사람과 있을 때,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할 때는 이렇게 시간이 밀도 있게 느껴진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오렌지 빛깔 금목서의 그윽한 향이 제주공항까지는 분명히 기억 속에 남아있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착륙과 동시에 눈을 떴더니, 금목서 향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사라져 버린 향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예전처럼, 꽃잎이라도 몇 개 따서 핸드폰과 케이스 사이 틈에 담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