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번째 ©Myeongjae Lee
7C174, B737-800
17:35, 탑승구 1A→4, 좌석 25F
왜 과거를 들여다봐야 하는가? 과거를 지도 삼아 내 삶의 연대기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결과물이 우리를 깨달음의 빛으로 가득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현재의 내 모습에서 지난 세월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처럼 쓰는 법 - 나의 일상을 짧지만 감각적으로>(재클린 서스킨, 인디고) pp.143-144
이런 류의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그만할까 고민되던 차에, 육지에 돌아와서 다시 읽은 이 책의 한 구절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결국 이런 소소한 기록들이 모이고 모이고,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또 미래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언젠가 나도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조금만 더 애써보기로 했다.
요즘, 일요일 오후 제주에서 육지로 가는 항공권 구하기가 몹시 어렵다. 항공사들이 중·대형 항공기를 해외노선으로 돌리고 있는 데다, 주말 제주에 박람회, 골프대회 등등 각종 행사들이 몰리는 시즌이라 그런 것 같다. 최근 제주도 당국이 국토교통부에 항공기 확대 배정, 임시노선 증편까지 요청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비단 나만 겪는 불편은 아닌 듯하다.
오전 11시 표를 며칠 동안의 새로고침, 새로고침 끝에 17:35 항공권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늘 오전 아내와 함께 신효동의 <감귤박물관> 마실을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2024 감귤아트전 <귤빛이 물들다 예술로 이르다>를 보았다. 전시 안내문에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의 작가들이 감귤을 중심으로 한 일상과 자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예술 작품으로 풀어낸 전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구 출신으로 서귀포에 이주한 지 20년 된 이율주 작가의 Village 시리즈, <제주 서귀포 - 귤 향 퍼지는 마을>이 인상적이었다. "인상적"이라는 말은, 방법이 있다면 한 점 소유하고 싶고, 추후 <책방2036>을 오픈하면 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든다는 의미다. 방법이 없을까.
방명록이 독특하고 예뻤다. 관람소감이나 작가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벽면 하나를 꽉 채우고 있는 수십 개의 봉투에 넣으면 작가님들에게 적은 글은 해당 작가님에게 배달을 해준단다.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이러한 아날로그적 소통 방식이 좋았다. 아차, 그러고 보니 혹시 작품을 구매할 수 없겠냐고 작가님에게 내 e메일주소와 함께 편지를 남겨볼 걸 그랬다.
아무튼, 그 밖에도 상설전시장에는 제주 감귤에 대한 다양한 아카이브가 전시되어 있어, 서귀포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감귤의 과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한 번 즈음은 추천할 만하겠다 생각이 들었다.
https://culture.seogwipo.go.kr/citrus/community/news.htm?act=view&seq=6098134
제주공항으로 향하는 급행버스 안은 답답했다. 에어컨을 작동할만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가 안 뜨겁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래도 창문을 많이 열자니 11월이라고 바람은 또 나름 차가웠다. 5cm 정도 열었더니 금세 스마트워치에 이 정도 데시벨의 소리가 지속되면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며 "소음 경고"를 보내왔다. 몸도 답답하고 속도 답답하고 멀미기운까지 있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만 살짝 창문을 열고 왔다.
제주공항버스정류장에 내렸는데 항공기 기름 냄새가 유난히 진하게 났다. 이륙 직전 활주로 이동 중에 비행기 안으로 잠깐씩 들어오는 기름 냄새에는 나름 애정이 있었는데, 이게 또 길게 맡으니 어질어질하다. 모르겠다. 유난히 피곤하기도 했고, 육지로 돌아가려니 마음이 시끄러워지고 이런저런 것들이 자꾸 거슬려서 그런 것도 같다. 탑승할 때만 해도 해가 떠 있었는데, 이륙 직전에는 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늘은 바다에 고깃배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 남쪽 먼바다에 풍랑경보가 발생해서 그런가 보다.
김포공항 활주로 위에서 탑승구가 열렸다. 이동식 계단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주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옷차림 편차가 커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조금 전만 해도 서귀포에서는 모기, 민들레, 제비꽃을 보았는데, 육지가 춥기는 춥다.
최근 제주 바다에서 사고가 잇달았다. 11.8. 새벽 비양도 북서쪽 해상에서 135금성호, 11.14. 구좌읍 세화항 인근 해상에서 모터보트, 11.15. 오후 성산읍 온평포구 인근 해상에서 성산선적 A호. 요즘은 이런 기사들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