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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Dec 12. 2023

리스 엮으며 여유를 배우다

풀에서 여유를 배우다

'대림절 화환 만들기'.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적었다. 발도르프학교 교사회의 때 결정된 내 할 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개의 초를 켜며 빛과 성탁의 의미를 되새기는 대림절 절기. 초를 올려놓을 리스를 만들어야 했다. 강당에도 놓고 교실에도 놓으려면 4개가 필요했다.


'대림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나. 인터넷 서핑으로 대략 어떤 모양인지 확인하고, 학교 옆 공터에 삐쭉하게 자라고 있는 주목나무 가지를 자랐다. 꽃집에서 꽃 묶을 때 쓰는 꽃철사를 사 와서 둥글게 묶었다. 잘 안 되는 건 '글루건'의 힘으로 봉합했다. 솔방울 몇 개 붙여주니 그럭저럭 있어 보인다. 십 년 전 나의 첫 엉성한 리스였다.



올해 생애처음 리스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생겼다. 시골에 살며 주변 들꽃과 나뭇가지 등 자연물을 활용해서 리스를 만드시는 동동님이 계셨다. 동동님께서 보여주시는 리스는 하나같이 예뻤다. 냉이꽃 리스는 별처럼 예뻤고, 벼이삭으로 만든 리스는 단아하면서 풍성함을 보여주었으며, 엉겅퀴꽃 리스는 깜짝 놀랄 만큼의 매력을 뽐내주었다. 여름에 만난 우리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들풀들을 채집했고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리스틀에다 끈으로 엮었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엮으니 끈이 보이지 않으면서 풍성한 들꽃 리스가 되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예쁜 보석을 만난 것 마냥 욕심이 생겼다. 가득가득 들꽃으로 채우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양의 식물을 뭉쳐 끈으로 엮기 시작했다. 하나 둘 채워질 때는 예뻤던 리스가 뚱뚱해지기 시작했고, 가분수처럼 한쪽만 커다래졌다. 이거 욕심이구나 알아차렸지만,  이미 커다래진 첫 부분과 균형을 맞추려면 나머지 부분도 양을 가득 채워야겠다. 둥근 리스가 있다고 할 때, 가운데 빈 부분과 리스틀이 황금비의 1:1.618로 채웠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나는 1:1은커녕, 0.5:1로 중간의 빈 부분 거의 없이 내용물로만 그득그득 채워진 리스를 만들어냈다.



좋다고 다 가지고 오면 이렇게 되는구나. 다양한 색감의 온갖 들꽃이 어우러져 꽂혀있는 리스를 보며 평소 호기심이 많아 여러 가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내가 떠올랐다. 나에게 한 우물 파는 일이 어찌나 힘든지, 열 우물은 팔 수 있는데 말이다. 호기심 천국인 아이에게 그거 나쁘니까 내려놓으라 할 수는 없는 법. 한두 가지 재료가 아닌 온갖 종류를 다 섞어놓은 리스도 나름의 빛깔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중요한 건 빈 틈 없이 빼곡한 리스의 모습. 빡빡했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to do list를 가득히 쌓아놓고 쉼 틈, 놀 틈을 주지 않는 나의 태도가 연상되었다. 시골에 살고 자연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갈망하면서도, 여유라는 녀석은 사막 속 신기루처럼 다가가면 사라지곤 했다. '빈 틈'을 설정하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면 빈 틈도 생기겠지 뭐, 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문제. 그놈의 빈 틈은 직장생활에서나 퇴사생활에서나 내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계절이 흘러 겨울이 되어 양평풀학교에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었다. 대표님께서 숲 속에서 칡넝쿨을 채집해서 리스틀은 칡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식물들을 꽃시장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구입해 오셨다. 정다운 칡리스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리스의 주된 재료는 삼나무. 제주도에 그렇게 많은 그 나무 말이다. 한 줄기 뚝 떼어 코끝으로 들이마시니 삼나무의 신선한 향기가 온몸으로 들어왔다. 나무가위로 10cm 정도 길이로 잘라 작은 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꽃철사로 엮는 시간, 일부러 '여유'를 떠올렸다. '빈 틈'부터 설정했다. 손가락부터 느긋해졌다. 급하게 쓸어 담아 꽂기보다 식물을 만지고 있는 순간을 즐겼다. 삼나무, 유칼립투스, 오리나무... 향기로운 겨울나무들의 어우러짐. 작은 송이들을 바라보고 어우러지게 배치하고 철사로 엮는 시간. "아, 너무 좋아요" "행복해요" 내면의 감동이 소리를 질렀다. 여유를 디폴트값으로 먼저 설정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1:1.618의 황금비와 비슷한 리스가 완성되었다. 그저 좋았다.


지금 마음에 그리는 이미지가 현실이 되어 세상에 나타난다고, 많은 마음공부 책에서 또 양자역학 등에서 말한다. '생각한 대로 이뤄진다' '마음에 품은 것이 시각화된다'라는 말은 이제 특별한 집단에서 쓰는 문장이 아니라 유튜브에 '마인드'만 검색해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여유로운 일상을 바란다면, 내 마음에 여유부터 품어야 하는 것이 순서다. 빈 틈과 쉼과 휴식도 열심히 챙겨야 누리는 법. 앞으로 직장생활을 다시 하든, 퇴사자로 좀 더 지내든 여유롭게 살고 싶다.


리스를 걸어두고 빈틈부터 바라보며 찬찬히 아름다운 식물 쪽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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