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쿨 cool Sep 01. 2021

아주, 조금 울었다

울고 싶을 때, 보면 좋은 책

혼자이고 싶지만, 외롭고 싶진 않을  때가 있다.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만,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펼치면 좋은 책.


<아주, 조금 울었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을 많이 만나야 했다. 4-5개월 같이 일하고 헤어질 때도 있었고, 혹은 아주 짧게 기획안 하나 만들고 헤어지거나, 아니면 몇 번의 회의만 하다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헤어질 때도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가까워지고, 또 쿨하게 헤어지는 게 일인 내가 언제부턴가 사람 만나는 게 싫어졌다. 이 짧은 시기만 지나고 나면 금방 모르는 사람이 될 텐데, 그런 사람을 알기 위해 내 에너지를 쓰는 게 아까워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온 날은, 현관문을 닫자마자 내 몸에서 영혼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가 이런 일회용성 대인 관계에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나에게 왜 이 직업을 택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게 좋아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나는, 내가 이 직업을 택했던 가장 원초적인 이유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일도 싫고, 사람도 싫고, 그래도 외로운 건 싫을 때 이 책을 만났다. 길지 않은 책이었기에, 한 번에 다 읽기보다는 나른한 오후에 커피 한 잔 만들어놓고 조금씩 나눠서 읽었다. 그래서 더 마음을 쿵쿵 울렸는지도 모른다.

'에세이는 너무 가벼워서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방법을 권하고 싶다. 에세이류의 책은 길이 자체가 짧기 때문에 한 번에 훅 다 읽기보다는 조금씩 나눠 읽고 혼자 그 나머지 여백을 음미하는 시간을 더 길게 가져보라고. 분명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만남'이라는 것이 귀찮아졌다.
한 사람을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친해지는 데는
시간과 노력과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낯선 누군가를 만나서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게
너무 힘들고, 피곤해졌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그동안 사귄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친해지고, 다시 헤어지고 하는 걸
수없이 반복했었다.
그때마다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귀찮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세상에, 사람 만나는 게 귀찮아질 줄이야,

한때, 매일 만나던 친구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면서도 할 이야기가 끊이질 않던 친구들도
어쩌다 한 번 보는 게 전부가 됐다.
다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해."
언젠가 언니의 충고에 따라,
동호회도 몇 개나 가입하고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나갔었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엄마가 잘못 기른 화초처럼, 모두 시들해졌다.

*

우리가 그리운 건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예전의 사람들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사람들.

- <아주, 조금 울었다> 중에서


사람들이 지긋지긋해졌을 때, 이 글을 읽었다. 나의 마음을 열어보고 쓴 글인 줄 알았다. 학창 시절엔, 1년에 한 번씩 새 학년이 되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도시락을, 혹은 급식을 혼자 먹지 않기 위해, 아니면 체육 시간에 혼자 나가지 않기 위해, 쉬는 시간 다들 매점으로 달려갈 때 혼자 우두커니 교실에 남아있지 않기 위해 항상 전투적으로 '무리'를 만들었었다. 이렇게 형성된 무리들 중에서 일부는 떨어져 나가고, 일부는 새롭게 합류해서 1년을 '친구'란 이름으로 지내다가, 학기 말이 오면 헤어지기 싫다고 서운해한다. 그리고 짧은 봄방학이 끝나, 새 학년이 되면 매의 눈으로 새로운 '무리'를 찾기 바빴다. 그때도 친구를 사귄다는 게 딱히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학기초'라는 시기만 지나면 나름 편했었는데. 이제 나는 그런 '대인 관계 탄력성'조차 한참이 지나도 안 없어지는 얼굴에 남겨진 베개 자국처럼 회복 불가능해진 걸까?


이런 시기가 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휴대폰도 무음으로 해두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며 나를 그냥 방치해둔다. 그렇게 가라앉다 보면 언젠가 바닥을 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까지는 그냥 가라앉으면 된다. 가끔 미안한 기분이 들면 이런 주문을 외운다.


나는 지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야. 시간을 충전 중이야!


별 거 아닌 것 같은 주문이지만, 이 말 한마디로 마음의 죄책감이 씻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바닥을 치게 되면, 그때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면 된다. 참 웃긴 게, 사람에 지쳐 가라앉기로 했으면서 수면 위로 올라와 한숨 돌릴라치면 또 사람이 그립다. 나를 포장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고, 화나면 화난 내 모습 그대로, 우울하면 우울한 내 모습 그대로, 언제나 나 자신 그대로를 보여줘도 좋을 사람. 날 것의 나를 보여줘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 서로의 뾰족했던 모서리가 뭉툭하게 닳아 갈 기회를 얻는다는 건, 가장 큰 행운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서로의 모서리가 닳아 가는 일

"그동안 여러 가지로 미안했어. 나한테는 좀 힘든 한 해였거든."
송년회 자리에서 선배가 술기운을 빌려서 말했다.

그녀는'우와! 그거 선배도 알았어요?'라고 농담처럼 말할까,
'아니에요. 힘들기는요.'라고 서로 뻔히 아는 거짓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웃고 말았다.

선배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하려 했고, 그냥 넘어갔고, 참았다.
만약 그녀가 그런 처지였다면
더 날카롭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이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 같아서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선배의 낯선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선배의 진짜 모습 중 하나이다.
좋을 땐 결코 보이지 않았던 모습.
사람은 힘들 때,
자신이 가진 가장 나쁜 모습들이 나오곤 하니까.

덜컹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선배를 좋아했다.
괜찮았던 시절, 선배는 그녀를 많이 챙겨 주었고,
그런 선배가 참 고마웠던 것이다.

서로 좋기만 한 관계라는 것은,
그런 시간만 함께 보냈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뾰족한 모서리를 갖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땐, 얼마간 적당한 거리를 두기 때문에
모서리가 서로에게 닿지 않고,
그래서 그게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다 보면,
관계가 좀 더 친밀해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의 모서리에 찔리게 된다.
그럴 땐, 내가 봐 왔던 모습이 아닌데,
내가 좋아한 그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한다.
결국, 그쯤에서 끝나는 사이도 있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서로 견디면서 깊어진다.
자꾸 부딪치다 보면 각자의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 가면서
뭉뚝해지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살짝 피하는 요령도 생길 테고.

*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인간적인 교류를 나눈다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모서리가 점점 닳아 가는 일이다.

- <아주, 조금 울었다> 중에서


가끔은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다른 누군가도 느껴본 적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뜨겁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글로 읽으며 꽁꽁 언 내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리며, 같은 위로를 건넨다. 내가 받고 싶었던 위로를. 위로받고 싶은 사람, 이해받고 싶은 사람, 이야기하고 싶은 외로운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때로 조금은 울 수 있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