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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 cool Aug 24. 2021

나의 돈을 주지 않는 너에게

나의 노동의 대가를 나라도, 제작사도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프리랜서로 사는 일은 녹록지 않다. 프리랜서가 이런 삶인 줄 알았다면, 20대의 나는 아마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을 동경하는 나는 15년째 이렇게 살고 있다. 


프리랜서는 참 슬플 때가 많다. 분명 내 몸과 머리를 힘들게 굴려 노무를 제공하면서도 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한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업무 내용 지시, 근무 시간 및 장소의 고정성'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업계 관행 상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구두로 일을 시작할 때가 많아서 돈을 떼어 먹히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고, 계약서를 쓰는 추세로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음지가 더 많은 게 이 바닥이고, 그게 '관행'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게 다 그놈의 관행 때문이다!


아는 사람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났다. 요지는 정부 사업에 입찰할 제안서를 만들어 보자는 거였다. 내가 맡은 역할은 콘텐츠 기획 및 기획안 작성이었다. 중간중간 회의를 했고, 수정에 수정을 거쳐 기획안을 만들었고, 그가 볼 땐 비루할지 몰라도 나의 피땀이 스며든 제안서가 완성됐다. 당연히 나는 기획료를 받아야 했지만, 입금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획안을 주면 기획료를 입금해 준다고 했다가, 다음에는 입찰이 끝나면 준다고 말이 바뀌었다. 무언가 틀어진다는 느낌은 이때부터였다. 


"그럼 기획료는 언제 입금되나요?"

"O월 OO일요."


당연히 기한이 지나도 돈은 입금되지 않았다. 그는 입찰 결과가 발표되면 기획료와 대본료를 한꺼번에 주겠다고 말이 바뀌었다.


"그럼 제안서가 낙찰되면 기획료와 대본료를 한꺼번에 입금해주시는 거고, 떨어지면 기획료만 주신다는 거죠?"

"네!"


이렇게까지 확인하고 기다렸고, 제안서 입찰 결과는 탈락이었다. 그리고 기획료 입금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열심히 했지만 안 된 건 안 된 거고, 나는 약속한 대로 기획안을 다 만들었고, 그가 원하는 날짜에 제대로 다 보냈음에도 입금이 언제 되냐고 묻는 나의 연락엔 읽씹인 그.


하지만 계약서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전화로만 이야기하고, 문자나 메일로 남겨놓은 사항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아무런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었다. 일을 하고 내가 내 노동의 대가를 받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바닥 사람들끼리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인데. SNS에 태그를 걸어서 망신을 줄까. 별 효과는 없겠지만 내용 증명을 보내볼까. 회사로 찾아가서 물어볼까. 물론 이런 생각 중에 실행으로 옮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까지도 인맥으로, 소개로 일을 하는 이 바닥에서 이렇게 밑바닥까지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프리랜서인 나에게 일거리가 끊긴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은 어느 정도 포기도 했었다.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다시 그와 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게 돈을 주지 않고 내 기획안으로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 기획안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했다. 혹시나 그가 나중에라도 나의 동의 없이 기획안을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게 뭐라고 괜히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 


혹시나 나처럼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이 필요한 경우엔, 한국저작권위원회 사이트에서 저작권 등록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https://www.cros.or.kr/page.do?w2xPath=/ui/main/main.xml


솔직히 거의 포기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이번에는 혹시 몰라 음성 녹음을 해두었다. 요는 다른 곳에 내 기획안으로 한 번 더 입찰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기획료 지급을 약속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물론 입찰 결과는 또 탈락이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기획료가 입금되었다. 받을 돈을 받은 것이지만, 아예 포기하고 있다가 돈이 입금되니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입금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의 대화는 이 두 줄로 끝났지만 어쨌든 손을 잘 털었다. 그때 SNS에 폭로전을 하거나, 내용 증명을 보내지 않길 잘했단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돈을 받고 해피 엔딩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렇게 해프닝으로 기억됐지만, 그 당시에 나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프리랜서라고 아무 하고나, 아무 일이나 다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도 나에게서 아웃이니. 


프리랜서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일을 시작할 때는 계약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메일이나 문자처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로 내가 해야 할 일과 페이를 명시해 두는 것이 좋다. 혹은 나와 고용주와의 대화 내용을 녹취해두는 것도 좋다. 증거와 자료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다음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꼭 문자나 메일로 페이를 명시하거나 통화를 할 경우엔 녹취를 해두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생각처럼 안 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고쳐나가야 하고, 바꿔야 한다. 프리랜서로 불안한 오늘과 더 불안한 내일을 살아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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