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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l 07. 2023

진동과 선, 우주의 역사

『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송) 강독 후기

10주간의 베르그손 수업이 끝났다. 이번 수업에서 느낀 것들.


내 몸에는 우주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것.


이번 베르그손 수업에서 가장 강렬하게 꽂힌 부분이다. 내 몸에 무기물의 역사도, 식물의 역사도, 고어류, 막시류, 절지동물, 척추동물의 역사도 이미 새겨져 있다는 것. '횡단'이라는 말이 절절하게 와닿았다. 물에서는 헤엄치고 땅에서는 걸을 것. 물에서는 물고기가 되고 땅에서는 척추동물이 될 것. 횡단할 줄 아는 삶이야말로 내 몸이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의 잠재성을 가장 꽃피우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실재하는 것은 모두 완전하다"는 말도 떠올랐고, 스피노자가 정의한 기쁨, 즉 '기쁨은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내 몸에 이미 새겨져 있는 생명의 잠재성을 얼만큼 현실성으로 꽃피울 수 있는가를 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은 지속의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의 시간 그 자체다.


이 말도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삶이 곧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속의 시간은 얼핏 보면 무용해보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내가 내 삶에 딱 붙어서 함께 진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고, 반대로 내가 유체이탈을 해서 내 삶에서 괴리되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지속의 느낌은 전자다. 몇년 전 철학 입문 수업에서 '지속'을 '연인과 키스할 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것'으로 처음 배워서, 무언가 '지속'을 떠올리면 마냥 행복한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그런데 이번 수업을 들으면서 감성이 바뀌었다. 행복한 설렘, 짜릿한 떨림도 진동이지만, 격렬한 고통 또한 진동 아닌가. 몸이 떨리는 순간. 고통의 순간에는 내 몸과 내 삶이 괴리될 수 없다. 고통은 몸을 자각하게 한다. 고통의 순간 삶이 착 하고 붙어 함께 공명하는 느낌이 든다. 그게 내가 느끼는 지속의 이미지다.


진동은 진동이라는 것.


베르그손을 배우면서 감성이 많이 바뀌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꽤나 힘든 시기에 이 수업을 함께해서 더 절절하게 와닿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세상은 진동 그 자체라는 것. 그걸 '이해'하려고 양자역학도 다시 파보고 이런 저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 수업이 끝나는 무렵 이제 저 사실이 그냥 받아들여진 것 같다. 아니 그냥 어떤 임계점을 지나 내 세계관이 한번 뒤집힌 것 같다. 나는 사랑과 교통사고를 같은 진동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수업을 듣는 내내 나를 따라붙던 질문이었다. 둘다 격렬한 진동이라는 측면에서 사랑과 교통사고는 같은 '사건'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은 긍정하고 교통사고는 긍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목이 마르니 물을 먹고 싶다-> 그러니 물은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정말 '직관'적 존재라면 둘을 동등한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삼스레, AI가 왜 직관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와닿는다.


선은 그냥 선이다. 점의 합이 아니다.


이 부분도 와닿았다. 철학을 배우고 초창기에 사람을 이해할라고 머릿속에서 그 사람의 스냅샷을 찍던 버릇이 있었다. 그 순간에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니, 그 사람과의 어떤 장면을 기억해 놓고는 집에 와서 그 장면을 하나씩 복기해보며 그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예전에 동생이 나보고 언니는 스케치를 천 장을 그리면서 가고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그게 그 시기였다. 그때 나는 '선'을 '점'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오늘 만나 크로키를 그리고, 그 다음 날 또 크로키를 그리고 그렇게 그린 크로키 백장을 이어서 그 사람을 이해해보려는 시도. 그런데 그 시도 끝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사람은 계속해서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그냥 선을 선으로 보면 되는데, 그걸 할 수 없으니(나는 점밖에 못 찍는 인간이다), 만날 때마다 점을 찍고 그 점을 이어서 "아, 사람은 선이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좀 줄었다. 예전에는 파악할 수 없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나는 함수적으로 생각하고 싶었으니까. 그때 내가 점을 찍던 동기는, 그 점의 추이를 통해 그 사람을 예측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수학자가 함수를 만드는 마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사람이 함수일 리가. 점으로 만든 그래프는 '선'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한 사람을 '선율'으로 들을 수 있을까.


제논의 역설을 듣고 웃음이 났다. 수학자들은 '점'을 찍고 '고정'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세계관인 나머지 시간마저 멈출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수학과 물리의 세상의 토대는 t0, t1이다. 세상에 t0은 없다. 정말 너무나 당연해서 알고 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자명한 사실을 참 돌고돌아 어렵게 확인하게 된다. 왜 원주민들이 서양의 식물학자들을 보고 웃었는지 알것 같다.


창조적 진화.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세포가 해체되어 고치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순두부 시기'다. 순두부 시기가 힘든 건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만 그렇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 수 있다. 내가 다 녹아서 원래 가지고 있던 형체는 알아볼 수도 없이 사라졌고, 그 전의 형체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무엇이 될지 도통 모르겠는 시기. 그 시기가 불안한 건 인간만 그렇다. 애벌레는 불안하지 않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밀알의 믿음'이라는 개념이 나왔었다. 밀알은 자신이 밀알을 맺을 것을 '믿는다.' 그게 밀알의 직관이다. 고치 속 애벌레도 그럴 것이다. 진화는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본성이다.


응축의 힘은 어디서 올까? 어떤 삶이든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응축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 뿐이다. 응축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지난 수업에 스승이 그려준 지속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보통은 지속하다가 불안 등등의 이유로 지속이 깨져 버려 응축하지 못하는 거라고. 스승은 직장 그만두고 알콜 중독시기에 그랬는데, 어느 날 그냥 이렇게 살바에는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씨발 죽기 전에 책 한권은 쓰고 죽자"라는 생각이 들어 지속할 수 있었다고. 고통과 자유의 상관관계가 떠오른다. 이상하게 고통에는 해방감이 있다. 고통스러운 만큼 자유로워진다고 해야 하나. 망한 삶의 자유랄까? 자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그런 생각이 든다.


뭔가 베르그손 수업을 들을 때마다 기묘하다. 다른 철학자들과 다르게 임팩트가 세게 와서 지각이 막 흔들리고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뭔가 세계관 자체가 나도 모르게 바뀌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걸 형용하기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서 어렵다. 물질과 기억 수업 때도 그랬다. 무언가 크게 바뀌었는데 표현이 되지 않는다. 창조적 진화도 그랬다. 내가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이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감각하기가 어렵다.


요즘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내 몸에 지구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집에 가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내 손끝을 보며 이 안에 돌의 역사도, 물고기의 역사도, 단풍나무의 역사도, 침팬지의 역사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창조적 진화를 듣고 달라진 점이다.


<감각과 기억 사이>, 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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