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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18. 2022

13. 홈패인 마음과 매끈한 마음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강독 후기

들뢰즈의 홈패인 공간, 매끈한 공간 개념을 배우고, 마음도 홈패인 마음과 매끈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동안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람들을 분석할 줄만 알지, 한 사람의 잠재성을 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뢰즈 입문 수업에서 한 존재의 실재성은 현실성+잠재성이라고 배웠다. 한동안 나의 고민은 '왜 나는 한 사람의 현실성 밖에 보지 못하는가'였다. 아니, 좀 더 정직히 말하면 '한 사람이 현재 왜 이런 양태인지 과거의 항들을 조합해 원인을 찾는 것밖에 못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분석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알았다. 내가 분석을 하는 이유는 감응하지 못해서라고. 나는 타자가 너무나도 두렵기에 타자가 이질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을 '이해'하려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분석해왔던 것이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으니까. 분석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한 사람을 머리로라도 이해하게 되면,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반감이나 불편함은 많이 사그라든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조금은 타자들이 덜 무서워진 이유일 테다. 하지만 분석은 한계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알았다. 분석은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는 거란 걸.


분석이든 심판이든 아무 짝에 쓸모없다. 분석은 내 마음을 덜 불안하게 만들 뿐, 한 사람을 조금도 푸르게 만들지 못한다. 한 동안 나는 왜 타자의 잠재성을 비춰주지 못할까가 고민이었다. 내 스승이 나의 온갖 어둠과 음습함을 뚫고 나의 잠재성을 비춰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왜 한 사람이 씨앗이면 씨앗의 모습만 보고, 그 안에 있는 꽃을 봐주지 못할까. 꽃을 봐주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실존을 껴안는 일이고 실존은 현재성과 잠재성 모두를 뜻하는 것이니까.




들뢰즈가 바다 모델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 바다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고른 판, 기관없는 신체, 매끄러운 공간, 바다. 쌤의 바다의 영토화 이야기를 할 때 출렁이는 바다 표면 위에 격자무늬 해역이 새겨지듯, 우리의 몸과 마음에 격자무늬로 수로가 파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자본주의로 코드화된 몸과 마음. 바코드처럼 홈이 패어버린 몸과 마음. 아, 내 마음은 홈패인 공간이구나. 마음에 수로가 이미 정해져 있다. 부모든, 사회든, 국가든, 자본주의든 내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권력자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새겨놓은. 마음에 수로가 패어 있으니까 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도 그 수로에 맞게 재조립해 버리고, 눈에 격자무늬 렌즈를 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수로를 파버린다. 나는 홈패인 공간의 홈, 도시의 수로가, 우리 마음의 집착 같았다. 내가 외모에 집착하면 그 수로로만 물이 흐르고, 내가 돈에 집착하면 그 도로로만 말은 달린다. 과거의 기억에 집착해도 이데아에 집착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홈패인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비추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똑같은 홈이 패인다. 밀접한 관계에서는 다 안다. 상대방이 어떤 길로 물을 흘려야 기뻐하고, 어떤 길로 물을 흘리면 슬퍼하는지.


한 사람의 실존을 본다는 건, 그 사람에게 새겨진 해역표시와, 그 밑에 출렁이고 있는 매끈한 바다를 동시에 봐주는 일이구나. 나는 들뢰즈가 매끈한 공간에서 홈패인 공간으로 '번역'된다는 표현을 쓴 게 참 마음에 들었다. 마음과 언어의 관계 같기도 하다. 마음은 바다고 그 마음을 번역한 언어는 해역표시다. 나는 언젠가 언어 너머 마음을, 해역 너머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내가 해방된 만큼만 너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 나의 밧줄을 푼 만큼만 너를 묶고 있는 밧줄이 보인다는 것. 나는 매끈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해역으로 보는 것, 더 나아가 내 시선으로 그의 마음에 더 깊이 홈을 파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불을 비추어 한 장의 지도 밑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출렁임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왜 감응하지 못하는가. 나는 집착하고, 집착하기에 감정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내가 파놓은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격정에 휩싸인다. 반대로 내가 파놓은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면 안도해서 또 격정에 휩싸인다. 격정은 감응을 막는다. 격정은 자기애적인 감정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희망하는 대로, 기대하는 대로 되거나 혹은 되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해일 같은 것. 해일은 표면을 덮어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내가 감정에 휩싸일 때 타자의 호흡과 눈빛과 떨림과 출렁임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없다. 그가 전달한 '감응'은 내 요동치는 마음의 파도에 왜곡되어 나의 감정에 잡아 먹혀 버린다. 집착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감응할 수 없다. 고요한 호수같은 마음으로만 감응할 수 있다. 매끈한 마음은 호수같은 마음이다.




나는 들뢰즈가 현실적이어서 좋다. 매끈한 공간과 홈패인 공간의 이분법적 개념을 세워놓고, 그 두 개념이 끊임없이 전치되고 전복되는 것을 강조하여 이분법의 경계를 흐려버린다. 들뢰즈의 철학 자체가 홈패인 것과 매끈한 것의 사이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영리하고 영악한, 유쾌한 발걸음을 가진, 말은 더럽게 안 듣는 작은 전사가 같다. 언제나 천근만근한 갑옷을 입고 한 걸음도 안 걸으면서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졌던 나는, 이제 짐을 하나씩 덜어내며 그 작은 게릴라 전사가 되고 싶다. 나도 최근까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목민이 되기 위해 모든 공간을 매끈하게 만들어야 하는 발상은 정말 비현실적이고 유치하기 짝이없다. 한 걸음을 걷는 게 무서우면 꼭 All or Nothing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들뢰즈가 정말로 세상을 초원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조바심이 사랑을 망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대신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감응하며 그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아껴주려 한다. 들뢰즈가 세상을 향한 마음이 그런 것 같다. 들뢰즈는 정말로 세상을 사랑하기에 이토록 느리고 작아보이지만 현실적인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국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피만 흘리는 방법이다. 진짜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측면으로 들어가 조용히 조심스레 빵을 나눠준다. 때로는 암살자가 되어 권력자의 목을 뒤에서 조용히 베고, 그 칼로 사람들의 몸에 묶인 밧줄을 조금씩 베어낸다. 어쩌면 전쟁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은, 어떤 명예욕 짙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름없는 암살자로 살고 싶다. 홈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은닉하고 때로는 소리치면서. 이유는 모르겠고, 그렇게 살면 제일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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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정돈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더 '감응'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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