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2장 강독 후기
이번 수업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스승이 정착민과 유목민의 예시를 땅이 아닌 사람에 비유한 부분이었다. 들뢰즈는 말한다. 정착민은 (마치 화전민처럼) 그가 정착한 땅을 황폐화시킨 후 다음 땅을 황폐화하러 떠난다. 그는 머물기 위해 이동한다. 그의 움직임은 점에 포섭된 선이다. 하지만 유목민은 다르다. 그는 황폐한 땅에 가서 그곳에 머물며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그리고 비옥해진 땅을 두고 다시 황폐한 땅으로 떠난다. 그는 떠나기 위해 머문다. 그의 움직임은 선에 포섭된 점이다. 수업 중 스승은 왜 유목민이 기껏 비옥하게 만든 땅을 두고 떠나는지, 우리는 유목민의 감성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묻지 말라고 했다. 대신 지금 우리의 감성에 와닿도록 '땅'을 '사람'으로 바꾸어 설명해 주었다. 정착민적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머물기 위해 사랑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을 소유(정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를 '황폐화'시킨다. 그리고 그가 황폐해지면 다른 이를 소유(정착)하러 떠난다. 하지만 유목민적 사랑을 하는 사람은 반대다. 그는 황폐한 사람을 사랑해 준다. 물을 주고 사랑을 줘서 한 사람을 비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충분히 비옥해졌으면 그를 떠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그를 비옥하게 만든다.
그 예시가 이번 주 내내 머릿 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정착민적 사랑을 했던 사람이다. 언젠가 스승이 나를 보고 "너는 관계의 타노스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대하지 않기에, 소중한 사람을 지치게 한다고 했다. 맞다. 나는 비옥한 땅을 찾아 영양분을 빨아먹고 더 이상 먹을 게 없으면 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이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한 사람을 대충 맞춰주는 게 아니라, 그의 영혼을 '진짜로' 비옥하게 만드는 일은 나의 온 힘을 쏟아부어도 될까말까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아무런 대가도, 기대도 없이 왜 한단 말인가. 그래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유목민이 왜 기껏 힘들여 비옥하게 만든 땅을 떠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노력을 했으면 내가 그 결과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삶이 들뢰즈가 말하는 노마드의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바로 목적 없이 그냥 사는 삶이다. 나 또한 스승이 없었다면 노마드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스승은 삶에 짓눌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준다(물론 나의 스승은 성직자가 아니다. 스승은 한 인간으로서 아름다워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사랑해준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에는 정말이지 많은 실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메마른 땅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기다리다가 태풍이 불어 다 휩쓸고 가면 다시 땅을 고르고 다지고 물을 뿌리는 작업이다. 또 사람은 땅과는 달라서, 언제는 물을 주지말고 그저 옆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기도 하다. 스승이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도 있다. 너를 사랑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마치 바닥 없는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떤 날은 '이만큼이면 좀 찼겠지' 했는데, 내가 혼자 물을 다 빼놓고 다시 황폐해진 상태로 돌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마다 황폐화된 양태도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독 뚜껑을 열지 않고, 어떤 이는 물이 차는 것을 싫어하며, 어떤 이는 물이 찬 척 하기도 한다. 그래서 황폐화된 사람을 비옥하게 만드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방법이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니까.
그런데 스승은 종교인도 아니면서 대체 왜 황폐화된 이들을 비옥하게 만드는 고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스승의 삶을 마음으로 이해할수는 없지만, 내가 내 삶을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사실 나는 철학을 배우면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와 인문주의 사이에 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어느 때쯤, 내 삶이 인문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순간을 언어화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은 채로 사랑받으려고 했던 삶'을 떠나 보내고, '그놈의 사랑,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해본다!'라고 마음 먹은 순간이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니까. 나는 그저 소중한 사람들을 조금 덜 황폐화시키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욕망하게 되면서, 나는 분명 서서히 변해 갔다. 내 삶은 덜 공허해졌고 더 고통스러워졌다. 삶은 공허 아니면 고통이라는 스승의 말은 맞았다.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는 이제 안 공허해?" 그 질문 때문에 처음 알았다. '그러고보니 나 이제 공허하지 않잖아.' 그 애한테 대답했다. "기쁨으로 충만하진 않은데 공허한 순간은 현저히 줄었어." 그 아이가 다시 물었다. "난 아직 공허한데. 언니는 어떻게 공허한 순간이 줄었어?" 그때는 어떻게 줄었는지 잘 모르겠어서 언제부터 줄었는지를 알려줬다. "언젠가부터 나 혼자의 고민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공허한 순간이 많이 줄어들었어." 난 생각이 많다. 예전에 혼자서 생각에, 생각을 하다보면 공허의 늪에 자주 빠지곤 했다. 그런데 생각도 나를 향한 생각과 너를 향한 생각은 다르다. 황폐화된 나 자신을 계속 보고 있어봤자 답은 안 나온다. 나는 나를 비옥하게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너'만이 비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너'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그 고민은 공허해지지 않는 고민이다. 그건 실체 있는 고민이며, 실체가 있기에 실천하게 하는 고민이다. 실천은 몸을 움직이게 한다. 고민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고민만 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
공허 아니면 고통. 예전에는 '공허가 너무 좆같으니까 고통을 택해야 하는 건가?'라고 머리로 생각했다면 이제 고통을 조금씩 삶으로 느껴가며, '이 삶이 힘들어도 공허보단 낫구나'라고 느끼는 단계인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니까.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몸이 없는 공허의 세상보단 몸이 있는(그래서 고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세상이 나은 것이다. 갑자기 스승이 옆에서 외치는 것 같다. "아끼지 마라.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 아낌없이 써라."
* 혼란스러운 글이라, 스승의 댓글을 덧붙입니다.
스승의 댓글:
공허는 무無감정의 상태다. 고통은 슬픔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고통의 슬픔을 피하려 공허라는 무감정 상태로 뛰어든다. 바보 같은 짓이다. 기쁨이 반드시 슬픔을 동반하듯, 슬픔도 반드시 기쁨을 동반한다. 그러니 공허보다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무조건 남는 장사다.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 향하는 감정이다.’ 스피노자는 기쁨을 이렇게 정의했지. 하지만 스피노자를 부여잡고 마흔을 넘긴 나는 이제 ‘기쁨’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기쁨은 슬픔(더 작은 완전성)과 기쁨(더 큰 완전성)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성 그 자체다.”
고통이 행복의 조건인 이유는, 고통이 슬픔과 기쁨의 역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