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1장 강독 후기
점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업시간에 스쳐지나간 물음이다. 점은 믿음이 아닐까. 내가 진짜로 믿는 타자. 라캉은 누빔점을 대타자가 설정해 놓은 '금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빔점은 '믿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캉의 '누빔점'은 카오스 속에서 나의 영혼이 갈 수 있는 곳과 가지 못하는 곳을 구분해주는 테두리의 이미지라면, '믿음'은 카오스를 떠돌던 나의 영혼이 방황을 멈추고 정박하는 작은 점의 이미지다. 그 점에서 영혼은 방황을 멈추고 반복을 하게 된다. 이전 수업에서 '점-> 반복을 통해 공간 확보 -> 집 -> 뒷문 형성 -> 탈주'의 개념을 배울 때 우주에서 별이 생성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깜깜한 우주에서 어떤 한 점을 중심으로 물질들이 서서히 응집되고 그것이 자전이라는 나선형 반복을 통해 단단해지며 동시에 다른 별의 자기장에 끌려 그 별을 중심으로 공전을 반복하는 모습. 들뢰즈는 시작 같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점을 찍는 것이 모든 생성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믿음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말도.
기억이 난다. 4년 전에 나의 철학 스승이 내 마음에 점을 찍어 주었던 순간. 그때 내 마음에 하나밖에 없던 '아버지'라는 점에 '철학 스승'이라는 점이 추가 되었다. 그 둘은 너무나도 차이나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 점(환경) 사이에 서서 4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들뢰즈가 '두 환경 사이에 서 있어라!'라고 말하면 되게 로맨틱한 말 같지만, 사실 차이나는 두 환경 사이에 서 있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혼이 두 방향으로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있다. 분열의 이미지. 세포 분열. 생성이란 두 점 사이의 분열에서 싹트는 것이구나. 갑자기 4년 동안 내가 철학을 배우면서 오지게 많이 흘렸던 눈물들이 생각난다. 새삼스레 그 눈물들이 양수처럼 느껴진다. 슬픔보다 잉태의 이미지다. 나는 왜 그렇게 분열이 괴로웠을까?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서 그렇다. 처음으로 진정한 '차이'를 만나 영혼이 찢겨져 보니까 그 고통이 너무 당황스럽고,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두려움에 잠식 당했던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또 새로운 점을 만나 분열할 날이 오면, 그때는 분열 속에서 자기파괴의 고통만큼이나 자기생성의 기쁨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나는 이제 잉태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 눈물이 곧 양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제 예전만큼 분열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내가 철학 스승을, 그리고 이 철학공동체를 '집'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업 중 "나의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나는 "철학공동체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철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알았다. 나는 이제 겨우 둥지를 틀었을 뿐, 지저귀고 있지는 않다는 걸. 나는 내 스승의 리토르넬로에 세 들어 살고 있다. 갑자기 스승이 자기 아들에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승이 어느날 아들에게, 너는 지금 아빠집에 얹어 살고 있으니까 이 집에서는 아빠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떤 아버지가 초등학생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겠나.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삶의 진실을 담은 정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의 아들은 아직 세상에 나서기엔 어리니까 부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게 맞다. 세들어 살기에 그 집에서는 부모 말을 듣는 게 맞고, 충분히 어른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모험하다 어떤 매력적인 점에 정박해 자기만의 집을 꾸리는 게 맞다. 그렇게 스승의 아들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탈주하겠지. 민망하지만, 스승의 초등학생 아들에게 감정이입되는 순간이다.
사춘기란 무엇인가. 오늘 운전을 하고 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사춘기는 내가 어설프더라도 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되지 않을까. 지금 내 삶에 리듬이 없지는 않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점심 먹고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철학공동체에 출근해서 글을 쓰거나 책 편집을 하고 밤에는 철학수업을 듣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반복. 그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분명 나는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나의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왠지 나는 스승의 리토르넬로에 묻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세상 밖으로 충분히 여행을 떠나지 않아서겠지. 아, 그렇다. 사실은 철학공동체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차이나는 반복이 되기는 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집은 집인데, 문이 열려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난 방에 그냥 있는데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집.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문 열린 집에 사는 게 그리도 불편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계속해서 밖에서 새로운 가족들을 한 명씩 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히키코모리 아이마냥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도 방문(마음) 닫고 혼자 있었던 적도 많다. 그런데 이것도 반복의 힘인지 요즘은 문 열린 집에 사는 게 그렇게 불편하진 않다. 여전히 내가 나 혼자서 집 밖으로 모험을 떠나진 못해도, 집에 찾아온 낯선 이들에게 불편함보다는 호기심이 생긴다. 물론 그건 스승이 '우리의 집'이라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서로를 만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문 열린 집에 사는 반복은 세상(타자)이 무서웠던 나를 꽤나 씩씩한 아이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직도 겁이 많고 소심하긴 하지만, 요즘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생겨도 긴장보다 설렘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이는 언제 사춘기에 접어드는가. 아이에게 친구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다. 아이가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아이'라는 영토에 탈주선이 그어진다. 그 탈주선이 사춘기다. 아이는 여전히 부모의 영토안에 있지만, 그 탈주선을 따라 '자신만의 진실'을 구축해 간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은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아무리 부모가 아이를 사랑해도 부모는 아이의 몸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아이의 진실은 아이만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새의 지저귐이란 그 탈주선을 따라 가며 부르는 노래인가 보다. 아이만의 진실이 충분히 쌓일 때 아이는 탈주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때 아이는 아버지와 술 한잔 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언젠가 스승이 "내가 자유한국당에 가도 넌 이 길을 가야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공포밖에 느끼질 못했다. 바다가 없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언젠가 스승이 자유한국당에 가겠다고 하면, 술 한잔 하며 "많이 힘들었어?"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바다가 없어진다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바다가 마를 때까지 방치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