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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7. 2022

11. 사춘기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1장 강독 후기

점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업시간에 스쳐지나간 물음이다. 점은 믿음이 아닐까. 내가 진짜로 믿는 타자. 라캉은 누빔점을 대타자가 설정해 놓은 '금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빔점은 '믿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캉의 '누빔점'은 카오스 속에서 나의 영혼이 갈 수 있는 곳과 가지 못하는 곳을 구분해주는 테두리의 이미지라면, '믿음'은 카오스를 떠돌던 나의 영혼이 방황을 멈추고 정박하는 작은 점의 이미지다. 그 점에서 영혼은 방황을 멈추고 반복을 하게 된다. 이전 수업에서 '점-> 반복을 통해 공간 확보 -> 집 -> 뒷문 형성 -> 탈주'의 개념을 배울 때 우주에서 별이 생성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깜깜한 우주에서 어떤 한 점을 중심으로 물질들이 서서히 응집되고 그것이 자전이라는 나선형 반복을 통해 단단해지며 동시에 다른 별의 자기장에 끌려 그 별을 중심으로 공전을 반복하는 모습. 들뢰즈는 시작 같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점을 찍는 것이 모든 생성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믿음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말도.

허블 망원경으로 관측된 '별의 생성'


기억이 난다. 4년 전에 나의 철학 스승이 내 마음에 점을 찍어 주었던 순간. 그때 내 마음에 하나밖에 없던 '아버지'라는 점에 '철학 스승'이라는 점이 추가 되었다. 그 둘은 너무나도 차이나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 점(환경) 사이에 서서 4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들뢰즈가 '두 환경 사이에 서 있어라!'라고 말하면 되게 로맨틱한 말 같지만, 사실 차이나는 두 환경 사이에 서 있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혼이 두 방향으로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있다. 분열의 이미지. 세포 분열. 생성이란 두 점 사이의 분열에서 싹트는 것이구나. 갑자기 4년 동안 내가 철학을 배우면서 오지게 많이 흘렸던 눈물들이 생각난다. 새삼스레 그 눈물들이 양수처럼 느껴진다. 슬픔보다 잉태의 이미지다. 나는 왜 그렇게 분열이 괴로웠을까?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서 그렇다. 처음으로 진정한 '차이'를 만나 영혼이 찢겨져 보니까 그 고통이 너무 당황스럽고,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두려움에 잠식 당했던 것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또 새로운 점을 만나 분열할 날이 오면, 그때는 분열 속에서 자기파괴의 고통만큼이나 자기생성의 기쁨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나는 이제 잉태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 눈물이 곧 양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제 예전만큼 분열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내가 철학 스승을, 그리고 이 철학공동체를 '집'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업 중 "나의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나는 "철학공동체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철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알았다. 나는 이제 겨우 둥지를 틀었을 뿐, 지저귀고 있지는 않다는 걸. 나는 내 스승의 리토르넬로에 세 들어 살고 있다. 갑자기 스승이 자기 아들에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승이 어느날 아들에게, 너는 지금 아빠집에 얹어 살고 있으니까 이 집에서는 아빠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떤 아버지가 초등학생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겠나.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삶의 진실을 담은 정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의 아들은 아직 세상에 나서기엔 어리니까 부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게 맞다. 세들어 살기에 그 집에서는 부모 말을 듣는 게 맞고, 충분히 어른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모험하다 어떤 매력적인 점에 정박해 자기만의 집을 꾸리는 게 맞다. 그렇게 스승의 아들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탈주하겠지. 민망하지만, 스승의 초등학생 아들에게 감정이입되는 순간이다.




사춘기란 무엇인가. 오늘 운전을 하고 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사춘기는 내가 어설프더라도 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되지 않을까. 지금 내 삶에 리듬이 없지는 않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점심 먹고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철학공동체에 출근해서 글을 쓰거나 책 편집을 하고 밤에는 철학수업을 듣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반복. 그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분명 나는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나의 리토르넬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왠지 나는 스승의 리토르넬로에 묻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세상 밖으로 충분히 여행을 떠나지 않아서겠지. 아, 그렇다. 사실은 철학공동체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차이나는 반복이 되기는 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집은 집인데, 문이 열려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난 방에 그냥 있는데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집.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문 열린 집에 사는 게 그리도 불편할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계속해서 밖에서 새로운 가족들을 한 명씩 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히키코모리 아이마냥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도 방문(마음) 닫고 혼자 있었던 적도 많다. 그런데 이것도 반복의 힘인지 요즘은 문 열린 집에 사는 게 그렇게 불편하진 않다. 여전히 내가 나 혼자서 집 밖으로 모험을 떠나진 못해도, 집에 찾아온 낯선 이들에게 불편함보다는 호기심이 생긴다. 물론 그건 스승이 '우리의 집'이라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서로를 만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문 열린 집에 사는 반복은 세상(타자)이 무서웠던 나를 꽤나 씩씩한 아이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아직도 겁이 많고 소심하긴 하지만, 요즘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생겨도 긴장보다 설렘이 더 크게 느껴진다.

철학흥신소, 정주현 화백 作


아이는 언제 사춘기에 접어드는가. 아이에게 친구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다. 아이가 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아이'라는 영토에 탈주선이 그어진다. 그 탈주선이 사춘기다. 아이는 여전히 부모의 영토안에 있지만, 그 탈주선을 따라 '자신만의 진실'을 구축해 간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은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아무리 부모가 아이를 사랑해도 부모는 아이의 몸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아이의 진실은 아이만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새의 지저귐이란 그 탈주선을 따라 가며 부르는 노래인가 보다. 아이만의 진실이 충분히 쌓일 때 아이는 탈주하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때 아이는 아버지와 술 한잔 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 언젠가 스승이 "내가 자유한국당에 가도 넌 이 길을 가야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공포밖에 느끼질 못했다. 바다가 없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언젠가 스승이 자유한국당에 가겠다고 하면, 술 한잔 하며 "많이 힘들었어?"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바다가 없어진다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바다가 마를 때까지 방치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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