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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7. 2022

10. 카오스와 집, 그리고 나의 노래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11장 강독 후기

"카오스는 거대한 검은 구멍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이때 사람들은 내부의 중심에 불안정한 하나의 점을 찍으려고 한다. 다른 때는 하나의 점 주변에 고요하고 안정된 “외관”을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이 검은 구멍은 자기 집으로 변하게 된다. 또 다른 때는 이 외관으로부터 도망칠 길을 만들어 검은 구멍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슬픔을 제거한다고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올 한해 내가 가장 진하게 경험했던 깨달음이 아닐까. ‘세 가지 선의 위험성’ 수업부터 계속 ‘카오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건 내가 아직 카오스의 외력에 버텨낼 수 있는 고요하고 안정된 ‘외관’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천개의 고원'은 언뜻 보면 챕터 사이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후기를 쓰다 보면 연관성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천개의 고원' 자체가 '리토르넬로'적이다. 첫 챕터부터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그래서 점점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에 익숙해진다), 계속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은근히 지난 챕터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이 다음 챕터에서 연결되어 나오기 한다. 이 책 자체가 나선형으로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카오스. 나는 인생의 슬픔을 제거하면 기쁨이 되는 줄 알았다. 철학을 배우고 일상을 살면서 느끼는 ‘직접적인’ 슬픔들, 예를 들면 분노, 반감, 증오, 위축 등의 감정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사라진 자리만큼 빈 공간이 생겼다. 예전에 스승이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흔들리기에 불안한 사춘기. 자기만의 중심을 가진 확신에 찬 노인. 이 양극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진정한 자기중심은 ‘흔들림’도 아니지만 ‘고정점’도 아니다. 그것은 ‘떨림’이다.”


“흔들리는 이는 자기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기중심은 타자의 이야기에 떨리기(공명) 위한 중심이다. 성숙은 ‘흔들림’의 범위를 줄여 ‘떨림’으로 나아간다는 것일 테다.”


아마도 나는 사춘기에서 노인이 되어 버린 것 아닐까. 나의 자기중심은 타자의 이야기에 공명하기 위한 점이 아니라, 나의 흔들림을 제거하기 위한 점이었으니 말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다. 들뢰즈는 차이를 긍정하지만, 차이를 ‘카오스’라고 한다. 하긴 혼란스럽지 않다면 애초에 차이가 아닐 테다. 차이로 가득 찬 세상은 혼란하다. 세포는 아무거나 주워 먹을 수 없다. 자신과 너무 차이 나는 것을 잘못 먹었다가는 뒤져 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뒤져 버릴 테니까. 우리가 아기일 때, 즉 가장 vulnerable한 상태로 카오스에 던져졌을 때, 최초의 집은 ‘부모(혹은 부모 역할을 하는 대상)’가 지어준다. 부모는 갓난아기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선별해준다. 가끔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갓난아기를 방치하여 아기를 죽게 하거나 치명상에 이르게 하는 부모가 있는데, 이는 부모가 최초의 집 역할을 해주지 않아서 아기가 카오스의 외력에 압사 당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기에게 집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집에는 반드시 뒷문이 있어야 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상처받은 경험 때문에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견고한 집을 지어주는 것 같다. 아니,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문이 없는 집을 지어준다. 아마도 나르시시즘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구축해놓은 뒷문 없는 집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나머지, 집 밖의 카오스를 만나본 적도 없고,  만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상태. 나 또한 뒷문 없는 집에 살아서 그토록 타자가 무서워진 것일 테다.


강박증자에 대해 생각해본다. 집. 나는 부모가 지어준 최초의 집에서 참 오래도 살았다. 그 집밖을 떠나본 게 유학생활이 처음이었다. 물론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부모가 지어준 집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유학생활에서 내가 겪었던 우울증은 분명 카오스(너무 차이나는 혼란한 환경)의 외력을 견디지 못해 검은 구멍에 빠져버린 상황이었다. 스승의 설명 중에 굉장히 와닿는 구절이 있었다. “카오스에 점만 찍으면 블랙홀이 된다. 그 점을 확대해서 공간을 만들어야 비로소 집이 된다.” 나의 유학생활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부모로부터 처음 떨어져봤지, 미국 대학 교육도 처음 받아봤지, 무엇보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 뒷문도 없는 집에서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집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상황 아니었을까. 나는 들뢰즈가 존재들이 소리로 영토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소리 벽이며 적어도 벽의 일부는 소리적인 것이다. 한 아이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려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한 주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라디오를 켜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하는 동안 카오스에 저항하는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모든 가정에서 일종의 소리 벽으로서 영역을 표시한다.”


유학생활을 할 때 항상 기숙사에 ‘무한도전’을 켜놨었다. 내용을 안 보더라도 누군가가 즐겁게 한국말로 떠드는 소리가 항상 들려야 마음에 안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미국이라는 거대한 카오스 속에서 내가 소리로서 ‘집(영토)’을 구축하려는 행위였다는 생각이 든다. 소리를 내는 행위는 어떤 존재가 자기 영토를 확보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 하나 아닐까. 그래서 층간소음이 들르면, 마치 다른 이가 나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 테다. 새삼스레 엄마가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도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듣는 장면이 떠오른다. 집 안에 한번도 자기 영토를 가지지 못했던 엄마는 자기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으로 겨우 숨쉴 수 있는 영토를 구축한 것 아닐까. 엄마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한쪽 귀로 팟캐스트를 듣는 건, 가족들조차 ‘카오스’로 느끼기 때문일 테다. 가족들도 카오스라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없으니, 함께 있을 때도 이어폰 속의 자기 영토에 발을 걸치고 있고 싶은 거다. 현대인들이 이어폰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테다. 점점 세상을 쪼개고 쪼개서 작은 차이마저 ‘카오스’로 느끼니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 다 이어폰 속 자기 영토에 도망가 있는 거다. 나도 그렇다. 나도 지하철을 타면 습관처럼 이어폰을 꽂는다.


내가 미국에서 항상 무한도전을 틀어놓던 것. 엄마가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것. 그것은 집은 집이지만 퇴행적인 집이다. 스승이 최근에 쓴 글 중에 ‘사람들은 상처 받기 싫어서 곰처럼 따뜻한 털옷을 껴입거나 악어처럼 두꺼운 갑옷을 입으려고 한다’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아마도 털옷을 입는 이는 상처받기 싫어서 관계에서 따뜻한 위로만 찾는 사람일 테고, 갑옷을 입는 이는 상처받기 싫어서 애초에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일 테지. 털옷과 갑옷은 둘다 퇴행적인 집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단독적이기에, 타자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은 피할 수 없다. 그 혼란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고 오해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갈등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생긴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번 상처받은 경험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약한 사람일 수록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기에 털옷이나 갑옷을 입게 된다. 뒷문이 없는 집. 내가 나갈 수도 없고, 타자가 들어올 수도 없는 집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퇴행적인 집의 끝은 점이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차이를 만나지 않으면 차이의 반복을 할 수 없다. 차이의 반복이 없으면 점에서 집으로 공간을 늘려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갑옷이든, 털옷이든 그 끝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오스를 피하려다가, 가장 움츠러들어버린 작은 점의 형태로 집도 없이 카오스에 내던져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퇴행적인 집과 생성하는 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리를 듣는가, 소리를 내는가의 차이 아닐까. 소리를 영토를 만든다. 하지만 타자가 생산한 소리로 영토를 만드는 행위는, 그 소리와 공명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퇴행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내가 미국에서 한국어 소음을 배경음으로 깔아 애써 영토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차이가 득실대는 카오스 속에서 익숙한(익숙한 것은 반드시 퇴행적이다) 소리로 정서적 안정감을 만드는 행위. 하지만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영토를 확보하면 그 영토가 자꾸 줄어들게 된다. 왜냐면 세상에는 큰 소리를 내는 타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 것은 남의 영토 안에서 작은 쉼터 마련하는 느낌이지만,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것은 그 공간을 나의 영토로 만드는 일이다. 소리를 듣는 것과 내는 것의 차이. 그리고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공명시킬 노래를 부르는 것의 차이.  


물론 퇴행적 집도 가끔씩 필요하다. 그때 내가 무한도전이라도 안 보면 어떻게 그 거대한 카오스를 견뎠겠는가. 하지만 그 엄마 품 같은 소리에 파묻혀 있다 보면, 어느덧 나의 영토는 점점 줄어 점이 되어버릴 테지. 소리를 내야한다.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게 ‘나’만의 아름다운 영토를 확보하는 행위다. 리토르넬로의 노래.


"마지막으로 이번엔 원을 반쯤 열었다가 활짝 열어 누군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또는 누군가를 부르거나 혹은 스스로 밖으로 나가거나 뛰어나가 본다. 물론 이전의 카오스의 힘이 밀려들어올 수 있는 쪽에서는 원을 열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원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영역에서 열어야 한다. (..) 일단 달려들어 한번 시도해 보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몸을 맡기고 자기 집밖으로 나서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한 아이의 통상적인 여정을 나타내는 운동이나 동작, 음향의 선 위해서 ‘방황의 선’이 생겨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리, 매듭, 속도, 운동, 동작과 음향이 나타난다.”


처음 가보는 길을 갈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내는 소리의 반복으로 움직이는 작은 집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 소리의 우산을 쓰고 차이를 마주치는 ‘모험’을 떠나라고 들뢰즈 할아버지는 이야기한다. 사람은 왜 표현하고 살아야 하는가. 차이로 득실대는 카오스 속을 유쾌하게 모험하기 위해서는 나의 '노래'를 부르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토는 반복되는 노래를 통해 구축된다. 매 순간 내가 부르는 노래가 나의 집이요, 나의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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