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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5. 2022

9. 공명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9장 강독 후기

공명. 저번 수업에서 가장 강렬하게 마음에 남은 단어다. 일주일 내내 공명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공명은 일어나는가.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런데 논리 덕후 기질 때문인지 계속 무언가 간질간질한 부분이 있었다. 오늘 ‘공명은 두 파동이 겹쳐지는 건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아니다. 공명은 두 파동이 합쳐져서 한 파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떻게 공명하는가.


그러다가 뜬금없이 이중 슬릿 실험이 생각났다. 요즘 유튜브에서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영상 몇 개를 봤다. 긴 틈 두 개를 뚫어 놓은 벽을 향해 물질을 연달아 쏜 뒤, 반대편 벽에 물질들이 닿은 지점의 분포를 보고 그 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구별하는 실험이다(반대편 벽에 생기는 분포가 이중 슬릿의 모양이면 입자, 물결 모양(?)이면 파동으로 구분한다). 이 이중 슬릿 실험이 양자역학이 탄생하게 된 시초인데, 그 이유가 전자를 이중 슬릿에 통과하게 했는데 파동의 분포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전자는 입자라고 여겨졌기에 당연히 이중 슬릿에서 입자의 분포를 보일 거라 예측했다. 그런데 이게 고약한 지점이, 그러면 전자가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거다. 전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다. '그럴수도 있지'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입자는 이중 슬릿의 한 틈밖에 통과하지 못하고, 파동은 이중 슬릿의 두 틈을 동시에 통과한다. 즉, 이때까지 입자와 파동은 상호배타적인 물질의 특성이었다. 그런데 전자가 이 둘을 동시에 충족하고, 심지어 관찰자 효과라고 해서, 이중슬릿을 통과하는 것을 관찰자가 관찰하면 전자가 입자처럼 행동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처럼 행동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아직도 이 관찰자 효과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이견이 많다고 한다.

이중슬릿 실험


이상하게도 이 이중 슬릿 실험이 몇주전부터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는 물질. 전자 뿐만 아니라 빛도 그렇다. 고전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라고 여겨졌는데, 현대에 와서 빛 또한 파동인 동시에 입자(광자 또는 빛알이라 한다)성을 지닌다는 게 밝혀졌다. 들뢰즈가 말하는 공명은 물질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지닐 때 가능하지 않을까.


파동은 무엇인가. 소리가 대표적인 파동 현상이다. 파동은 매질을 통해서 전달된다. 소리는 어떤 물질의 떨림이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다른 물질(인간의 경우 고막)을 떨리게 만드는 현상이다. 그 고막의 떨림을 우리는 ‘소리’로 인식한다. 이제 왜 음악을 시각으로 듣는 사람이 있는지 알겠다. 그 파동을 소리와 더불어 ‘떨림’으로 ‘보는’ 것이구나. 공기도 분자다. 어떤 것의 떨림이 공기를 떨리게 하고 그 공기의 떨림을 내 신체(고막)의 떨림으로 감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감정 또한 소리 아닐까.




오늘 바이올린 수업을 처음으로 했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선생님이 감성을 강조하는 분이라서 어색한 것도 있었는데, 바이올린 악기통의 떨림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악기의 진동이 턱과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데, 내가 아직 섬세하게 조절을 못하니까 생각보다 떨림이 너무 크거나 작아서 자꾸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 밥을 먹는데 바이올린 줄의 떨리는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작곡가는 자신의 떨림(감정)을 물질의 떨림(바이올린 현)으로 저장하는 사람들 아닐까. 들뢰즈가 예술가는 지각의 대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음악은 작곡가가 자신의 감정을 소리의 형태로 저장한 것이다. 그 음악을 들었을 때 ‘정동(affect)’을 느끼는 것은 그 작곡가의 떨림이 공기의 떨림(소리)를 통해 나의 신체의 떨림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왜 그렇게 음악을 강조했는지 알겠다. 그림이나 글은 추상적인 ‘떨림’이라면, 음악은 ‘떨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은 공명하는가. 감정의 매질은 무엇인가. 누군가와 공명하는 순간이 있다. 그 사람의 떨림이 곧바로 나의 신체의 떨림으로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감정은 몸에서 나는 소리다. 한때 나는 타자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다. 여전히 나는 오즈의 마법사의 깡통 로봇 같은 면이 많지만, 이제 조금은 타자와 공명한다는 게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타자와 공명한다는 것은 타자에게서 나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을 비추고 이해한 다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이해 다음에 감정이 아니다. 그냥 단박에 느끼는 거다. 굳이 따지자면, 공명 다음 이해다.

너와 내가 껴안고 있을 때, 공명에 매질은 필요 없다. 그래서 사랑은 가까이, 더 가까이서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들뢰즈는 정동이 곧 ‘–되기’라고 한다. 내가 음악을 듣기 시작한 시점과 타자의 감정이 공명되기 시작한 시점이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테다. 탑 클래스 연주자들이 왜 작곡가의 생애에 대해 관심을 갖는지 알 것 같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의 감정의 파동과 같이 공명해 무엇을 느끼면, 왜 베토벤은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알고 싶어질 것 같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어떤 곡을 연주하기 전에 작곡가의 삶과 그 곡을 만들 당시의 상황 같은 것을 연구한다. 들뢰즈가 「질 들뢰즈 A to Z」에서 철학자의 개념은 철학자의 사자후와도 같다고 했다. 글을 읽다보면 어떤 문장은 마음에 꽂힌다. 문장은 파동이 아니지만, 쓰는 이의 기운을 담는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몸에서 나는 소리가 ‘기’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미세한 떨림. 작가는 그 떨림을 문장에 담는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는 사람 중에 그 작가의 떨림과 공명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내 스승도 그렇게 '철학자-되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스승은 스피노자의 문장과 공명했겠지. 길 가다가 흘러나온 음악에 온 마음이 흔들려버리듯, 그는 어떤 철학자의 문장에 영문도 모르게 공명해 버렸겠지. 그 공명을 타고 그가 궁금해졌고, 그가 궁금해졌기에 그가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졌겠지.


어느 날 들이닥쳐 온 마음을 흔들어놓는 매혹적인 타자. 불길한 선택. 탈주. 나는 그 공명을 기다린다.


LIBER TANGO by Layers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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