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9장 강독 후기
지난 수업을 들으며 내가 지금까지 철학을 배우면서 마주했던 모든 헛발질을 들뢰즈 할아버지가 졸라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총결산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났을 때, ‘천개의 고원을 더 일찍 배웠다면 좌충우돌을 줄일 수 있었을텐데!’라는 쓸데 없는 후회가 들었지만, 어차피 과거의 눈 먼 나는 들뢰즈 할아버지가 아무리 얘기해줘도 콧방귀나 뀌고 있었겠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헛발질을 반복하겠지만, 그래도 들뢰즈 아저씨가 ‘세 가지 선의 위험성’에 대해 요점정리까지 해줬으니 이제 좀 더 균형을 잘 잡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의 또라이 기질은 단지 졸라 억압이 많은 환경에서 살았기에 형성된 기질이란 걸 이제는 안다. 철학을 배우고 처음으로 억압을 해체했을 때 크게 튀어오르는 사람이 있고 작게 튀어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물론 전자였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강건하고 쿨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냥 그간 탱탱볼에 너무 많이 압력이 가해져 있었기에 높이 튀어오른 것일 뿐이었다. 나는 들뢰즈가 “공포”라고 일컫는 “그램분자적 선분성에 대한 위험성”이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
“공포,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안전,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거대한 그램분자적 조직, 우리가 달라붙어 있는 나무성들, 우리에게 잘 규정된 지위를 부여해주는 이항적 기계들, 우리가 들어가는 공명들, 우리를 지배하는 덧코드화의 체계, 우리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원한다.”
나는 나무성을 아버지 한 사람에게 몰빵한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확보하고 있고 심지어 축적된 돈을 평생 동안 잘 관리해온 나의 아버지. 그리고 관계 중에 가장 안전한 관계인 부모-자식 관계. 나는 '돈'과 '부모-자식', 그리고 '결혼'까지. 무려 세 개의 견고한 그램분자적 선에 내 인생을 단단하게 정박시켜놨다. 그렇게 평생 안전할 거라 믿었던 삶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흔들리고 무너지니 당연히 거대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우리는 허영과 자기만족이 관대하게 우리에게 부여해준 여러 가치, 도덕, 조국, 종교, 개인적 확신 등은 안정된 사물들 속에 서서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 세계가 마련해 놓은 체류지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이러한 거대한 혼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램분자적 선의 끝에서 가장 거대한 혼란을 마주했을 때 철학공동체에 왔다. 어제 수업에서 한 친구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묻자 스승이 “없다”고 대답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점이 있어야 선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램분자적 선은 하나의 거대한 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는 구조를 딛고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지, 구조가 없는 상태 혹은 구조에서 벗어나기만 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그램분자적인 선들로 점철된 내 과거의 삶은 점으로서는 훌륭한 기능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공포’에 휩싸여 평생동안 한 점에 정박해 살았던 만큼, 그 공포를 이겨내고 처음으로 선을 그었을 때 나는 정신을 못 차렸다. 흔히들 말하는 ‘철학뽕’이 아주 거하게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학뽕은 첫 번째 ‘공포’의 뒷면과 같다. 첫 번째 위험인 ‘공포’가 그램분자적 선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이라면, 두 번째 위험인 ‘명확성’은 그램분자적 선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둘 다 뿌리가 불안이기에 당연히 위험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아, 철학뽕. 나는 정말로 스승과 동지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승과 동지 없이 혼자서는 첫 번째 위험도, 두 번째 위험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언제나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스승과, 아무것도 모르고 같이 철학뽕 맞고 미쳐 날뛰던 동지들. 들뢰즈의 말은 옳다. 탈주가 가지고 있는 절망의 공포는 옆에 같이 미친 사람들, 즉 내 눈안의 광기를 사랑해주면서 자기도 위스키 중독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때만 넘을 수 있다. 철학뽕도 함께 맞으면 참 즐거운 면이 있다. 친구들랑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들이 새삼 생각난다. 다들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처음으로 억압에서 벗어나서 너무 기쁜 나머지 참도 잘 재잘거렸다.
"우리도 한번에 실재계로 가려면 디오게네스처럼 광장에서 자위를 해야하나."
"야, 좀 현실적인 걸 생각해보자."
"누드모델을 하는 애들은 발개벗고 복도 돌아다니면서 자기 몸 보고 그림 그리는 애들한테 당당하게 “내 몸이 이렇게 생겼어?” 물어본대."
"우와. 대박이다. 너 누드모델 해봐."
지금 보면 철학 중2병들의 오그라드는 대화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두 번째 위험성, ‘명확성’은 사춘기랑 닮았다. 사춘기는 부모로부터 첫 탈주 시도이기에 과도하게 진지하고 과도하게 삐뚤어지는 것이다. 철학뽕도 마찬가지다. 아주 그냥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극우로 살다가 극좌로 가서 그램분자선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 ‘명확성’, 즉 떨림과 균열자체에 매몰될 위험성은 엄연히 존재하는 그램분자선을 없애거나 외면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생긴다. 어떻게 나의 길을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길 자체를 부정하고 그냥 하늘을 날고 싶은 것이다. 철학뽕의 핵심도 그거였다. 그때 나도, 나와 함께 철학뽕을 맞았던 친구들도 그램분자선 하나 정도 흔들어봤을 뿐, 여전히 여러 그램분자선이 겹쳐진 지점에 서 있었다. 근데 그때는 삶에 존재하는 그램분자선에서 어떻게 또 작은 떨림을 만들고 작은 생성을 할까를 생각하기보다, “그램분자선은 나쁜 거야! 그러니 이제 그램분자선에 매이지 않을거야!”하고 분자적 선분만 있는 삶을 꿈꿨던 것이다. 그건 세상에 완벽한 자유가 있다고 믿는 것처럼 무지한 생각이었다.
내가 철학뽕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스승이 나에게 글을 하나 써주었다. "넌 지금 선을 너무 길게 그은 상태다, 그래서 선이 휘청거리는 거다, 점이 꼭 나쁜 게 아니다, 올 한해는 점을 찍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래서 점을 찍으려고 했는데, 살짝 찍는 시늉을 하는데 또 다른 선을 그어버렸다. 아직 과거의 선도 점을 안 찍은 상태에서 또 다른 선을 긋는 바람에 나는 검은 구멍에 빠져버렸다. 나는 자본주의의 중심에 흠뻑 빠졌다가 죽다 살아난 만큼, 과거의 삶에서 더더더더더 많이 멀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을 배우고나서 늘 그 조급함에 시달렸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그 어떤 위기 상황이 와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 만큼 많이 가놔야한다고 생각했다. 온갖 것이 다 무서웠다. '나에게 그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돼!’ 참 어찌나 불안했던지. 그래서 계속 선을 그은 거다. 조급해서. 무서워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무서워했다는 것 자체가 과거에 시선이 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첫 번째 위험과 두 번째 위험은 한 세트가 맞다.
검은 구멍에 빠졌다. 이 검은 구멍을 ‘명확성’이라고 이름 붙이다니. 굉장히 아이러니한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떨림과 균열을 명확하게 볼 때, 그 떨림과 균열을 제외한 모든 것이 모호해진다. 거대한 혼란이다. 림보. 올 한해 동안 난 계속 검은 블랙홀 속에서 사경을 헤메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는 줄 알겠다. 떨림과 균열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해서였다. 떨림과 균열만 명확하게 보느라 나머지를 다 보지 못한 것이다. 난 내가 림보에서 이제 좀 정신차리고 나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삶이 림보인 것이다. 삶은 늘 불명확하고, 늘 떨리고 있고, 늘 미세한 균열이 진행 중인데, 나는 그 불명확성, 떨림, 균열이 너무 불편하고 무서운 나머지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삶이 림보처럼 느껴진 것이다. 시선이 문제였구나. 내가 순두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난 배아가 된 것이었다. 아, 그래. 떨림을 다루는 방법을 좀 배운 것 같다. 떨림은 불편하다. 불편하지 않다면 떨림이 아니다. 그런데 예전의 나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감도가 너무 센 나머지(왜냐면 나는 차이를 극도로 두려워했으니까) 불편함이 일으키는 각종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버렸다면, 이제는 떨림을 만났을 때 부지불식간에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한 박자 쉬고 이중보기할 수 있는 역량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떨림 그 자체를 명확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아, 그래. 이중보기를 할 때, 내가 왜 떨리는지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떨림의 검은 구멍에 빠진다. 대신 떨리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떨림을 없애려고 하지 말자, 떨림은 떨림대로 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뭔지 생각해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낫다.
“도주선은 벽을 넘고 검은 구멍들로부터 빠져나와도 다른 선들과 연결접속되고 매번 원자가를 증가시키는 대신 파괴, 순수하고 단순한 소멸, 소멸의 열정으로 바뀐다.”
“전쟁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전쟁 기계, 그리고 파괴를 정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들을 소멸시키기를 수락한 전쟁 기계, 다른 선들의 모든 위험은 바로 이 위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탈주를 한 적이 있을까. 나는 생성을 위해 투쟁을 한 적이 있나. 지난주부터 고민했는데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철학 체육관에서 안전하게 스파링하며 수행 중이지, 아직 실전 대회에 나간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전쟁기계가 된 적이 없다. 그런데 탈주를 하며 전쟁기계가 되었다가 전쟁기계에 빠져버리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겠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된 사람들. 싸움 자체에 매몰되어 모두를 죽이고 싶은 순수한 열정에 휩싸인 사람들. 부르주아와 싸우다가 부르주아를 다 죽여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운동권 사람들. 남성권력과 싸우다가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페미니스트들.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은 사람이야 말로 그 무언가를 가장 욕망하는 사람 아닌가. 어렵사리 그램분자적 선의 벽을 넘고 분자적 선의 검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탈주에 성공한다 해도, 탈주 중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전쟁을 치르다가 그 전쟁 자체에 매몰될 위험이 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전쟁을 하는지를 까먹은 채 전쟁만 하는 전쟁광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 위험성을 이해한다. 왜 탈주 과정에서 전쟁에 매몰되는가. 나는 내가 탈주를 시작했을 때 전쟁괴물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난 약하기 때문이다. 약하기 때문에 강해져서 전쟁기계가 되었을 때, 그 강함에 취해버릴 수가 있다. 그 강함에 취해 또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 '순수한 열정'에 휩싸일 수 있겠지.
네 번째 위험성인 ‘혐오’, 즉 탈주선의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선을 전쟁이 아닌 생성에 두어야 한다. 탈영토화는 재영토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재영토화 없이 진행된 탈영토화는 진정한 의미의 탈영토화가 아니다. 그런 반쪽짜리 탈영토화의 선이 전쟁괴물이 되는 위험성에 바로 맞닿아있다. 그러니까 안티테제는 좋은 테제가 아닌 것이다. 무언가를 반대하기 위한 탈영토화 혹은 무언가와 싸우기 위한 탈영토화는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 상대를 죽음으로 몰면서 나도 죽음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니까 들뢰즈의 말처럼 “거대한 혐오, 즉 죽이고 싶고 싶다는 욕구, 소멸의 열정”은 가장 위험한 것이 맞다. 자신의 생성을 가로막을뿐더러 모두의 생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네 번째 위험성 ‘혐오’와 세 번째 위험성 ‘권력’이 합체될 때 나치는 탄생한다.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은 ‘혐오’의 위험성에 빠져있지만 아직 ‘권력’이 합체되지 않았기에 파시즘까지 가진 못한 것이다.
“모든 창조는 전쟁 기계를 통과한다.”
나는 그냥 그램분자적 선과 전쟁을 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재영토화를 위한 탈주를 위해 그램분자적 선과의 전쟁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유효하다. 네 번째 위험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애초에 전쟁을 위한 탈주를 해서는 안 되고, 생성을 위한 탈주를 하더라고 전쟁 중에 계속 전쟁이 아닌 ‘생성’에 시선을 두고 있어야 한다. 결국은 방향성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가.
“흐름이라는 것은 항상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다. 믿음과 욕망은 모든 사회의 토대다.”
흐름이 바로 방향성이며, 그 방향성은 믿음과 욕망으로 결정된다. ‘이게 옳다’는 믿음과 ‘이게 좋다’는 욕망.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좋아하는가. 결국 삶을 구성하는 것은 방향과 걸음 두 가지이다. 나는 어떤 방향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가. 그것이 –되기이며 그것이 삶이다.
그램분자적 선, 분자적 선, 탈주선이 뒤엉켜 있는 게 세상이다. 우리는 탈주를 잘 하지 못하도록 억압되어 왔기에 탈주선은 '좋은 거', 그램분자적 선은 '나쁜 거'라고 배우지만, 사실 그 세 선은 그냥 있을 뿐 가치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을 없애려는 시도는 폭력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