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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4. 2022

7. 알콜중독과 정신병자의 사랑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제8장 강독 후기

천개의 고원 수업 중에 저번 수업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일주일 내내 문장과 단어가 덩어리져 머릿 속을 맴돌았다. 후기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계속 들었는데 정작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몰랐다.


“내가 너의 눈에 있는 광기의 번뜩임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입술에 있는 위스키의 맛을 사랑해다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내 젤다에게 했다는 이 문장이 강렬하게 가슴 속에 남았다. 스콧과 젤다의 결혼 생활에 대한 글을 읽었다. 유명한 명문가 연방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 젤다와 스콧은 사랑에 빠졌지만, 젤다는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남자를 원해서 스콧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다가 스콧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결혼을 승낙했다. 스콧은 작품 활동으로 번 돈은 젤다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들어가고, 스콧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출판사와 책을 한꺼번에 열권씩 계약을 하고 할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스콧은 알콜중독이 되고 젤다는 신경쇠약을 동반한 정신병에 시달린다. 젤다와 스콧 각각 다른 연인과 바람이 나기도 한다. 나중에는 젤다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스콧은 49세의 나이에 알콜중독으로 사망하고 젤다 또한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정신병원에 화재가 나서 죽는다. 이렇게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누가 봐도 서로를 ‘파멸’하는 관계로 보이는데, 스콧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의 친구와 친지들 가운데 50프로는 젤다를 미치게 만든 건 나의 술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것이고, 다른 절반은 나를 음주로 몰고 간 건 그녀의 광기라고 당신에게 확언할 것이다. 이런 판단들 그 어느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양쪽 다 우리들 각각이 서로가 없었다면 더 잘 살았을 거라고 말하는 데는 만장일치일 테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인생에서 지금보다 서로에게 더 반한 적이 없었다. (...) 우리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아주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서로를 파괴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무엇을 파괴라 하고 무엇을 생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파괴와 생성을 구분 짓는 가치판단은 누가 하는가. 파괴와 생성은 언제나 동시적인 것인가.

스콧 & 젤다 피츠제럴드




최근에 자아가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느낌. 저 문장을 조성모의 '가시나무' 노래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내가 ‘나’로 가득차서 당신이 쉴 곳이 없다는, 나르시스트의 자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저 문장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언젠가 스승이 내가 한 번도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내 안에 숨어있던 수많은 가면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무한한 얼굴들.


혼란스럽다. 가끔 스승이 "난 언제라도 김문수 될 수 있어."라고 말할 때 그가 지나치게 스토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정말로 스승은 자신이 언제라도 김문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늘 멈춰서서 이중보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겠다. 내 안에 수많은 가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 또한 어떤 배치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언제라도 아버지가, 어머니가, 혹은 내 친구를 괴롭히는 직장 상가가 될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자기계발적인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누구’ 안에는 내가 경멸하거나 증오하는 대상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깨달음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해방감으로 뒤집혔다.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 안에 수많은 가면이 있고, 그 가면의 전치가 곧 나”라는 사실이 온전한 진실로, 그리고 자유로 느껴졌다. ‘김문수가 될 수 있다면 문재인도 될 수 있다는 뜻이지!’라고 가치 판단해서 억지스럽게 의미를 전복시킨 게 아니었다. 그냥 ‘나는 비어있다’는 사실이, 나를 해방시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자연표류. 소요유. 내가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더듬이가 생길지, 날개가 생길지, 비늘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 그걸 이중보기로 지켜보는 게 삶이라는 것.

생물들의 자연표류에 대한 물방울 비유『앎의 나무(움베르또 마뚜라나)』중




농도에 대한 생각을 한다. 가면의 반복. 어떤 가면을 얼마나 반복하는지, 그 각각의 반복의 농도가, 그 농도의 분포가 곧 '나'구나. 제 아무리 울창한 숲이라도 누군가가 계속 걷는 행위를 반복하면 길이 생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뚜렷한 길이라도 누군가가 걷는 반복을 멈추면 몇 달만에 흔적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숲은 '하얀 벽'이고, 길은 숲의 ‘인상’ 아닐까. 스승이 최근 글에 쓴 것처럼, 컴퓨터에 있는 폴더들, 그 폴더들 안에 들어 있는 파일들의 개수, 그 순간순간의 분포가 곧 나의 현재 삶이구나. 가면과 가면의 농도. 빛과 빛의 채도. 순간의 내가 곧 나라는 사실.


욕망에 대한 생각도 한다. 욕망은 어두운 전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전기가 흐를 길을 결정짓는 요인. 요즘은 삶이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과거에 멸시하고 반감을 갖던 그 무엇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니. 나는 삶에서 철학이나 예술을 욕망한 적이 없다. 나는 철학이나 예술하는 사람을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 방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나약한 한량’ 정도로 폄하해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멸시와 반감의 감정이 사실은 내 욕망의 뒤틀린 발현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 친구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나 초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에 ‘끌림’을 느끼는 내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나 초능력에 대한 방송을 많이 봤었는데, 그때마다 경멸의 감정을 느꼈었지. 혼자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나 초능력자의 실체를 파헤치는 책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세상이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나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실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이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의 구분은 별로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엄밀한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느끼는 끌림, 그 친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을 나도 보고 느끼고 싶다는 욕망,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욕망이 내 안에 있는줄도 몰랐던 나의 가면을 발견하게 해줄 테니.  

무제, 정주현 화백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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