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손) 강독 후기
철학을 배우면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있다. 바로 양자역학이다. 같이 철학을 공부하는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나만 양자역학에 꽂혔다. 그 이유를 최근에 알았다. 내가 제일 과학적인 인간이라서 그렇다. 양자역학은 철학과 과학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나는 철학을 믿음으로 배웠고, 지금도 믿음으로 배우고 있다. 믿음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그 믿음이 없으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배우지 못한다. 믿음은 진정한 배움의 시작이다. 일단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옳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믿을 때, 새로운 사고의 길이 뚫린다. 그 길을 뚫어야만 내가 모르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길을 뚫지 않고 얻는 앎은 지식이지 배움은 아니다.
사실 공부는 무엇을 철저하게 믿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철저하게 믿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그렇지. 누구보다 믿음이 세지만, 논리적이기도 한 나는 철학을 공부할 때마다 늘 그 논리와 믿음 사이에 분열이 났다. 물론 균형추가 믿음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뒤로는 그 분열이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늘 과학과 철학 사이에 분열이 나 있는 지점을 메꾸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 때문에 내가 양자역학에 꽂힌 것일 테다. 그 분열은 양자역학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메꿀 수 있는 것이니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양자역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고실험이다. 실험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완전히 밀폐되고 불투명한 상자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있다. 청산가리가 담긴 병위에는 망치가 있고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다.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가 내려처져 청산가리 병이 깨지는 구조고 결국 그 병이 깨지면 고양이는 중독되어 죽고 만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는 1시간에 50% 확률로 핵붕괴해 알파선을 방사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있다. 이럴 경우 1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사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슈뢰딩거라는 과학자가 양자역학의 피상적인 면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사고 실험이다. 쉽게 말해, 양자역학이 말이 되냐고 조롱하기 위해 만든 예시다. 양자역학의 기초가 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이 사고실험에서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까지 ‘생’과 ‘사’가 중첩되어 있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죽음 OR 삶), 죽어 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하다는 것(죽음 AND 삶)이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개념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빡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하다.
그럴 수 없다.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로가 서로의 여집합 아닌가. ‘고양이가 반은 죽고 반은 살았다(즉, 50프로 정도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고양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은 상호배타적 개념이니까. 물론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현실 세계에서 재현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 상자 속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상자 안을 보지 못하니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을 뿐.
이중슬릿 실험이라는 게 있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비판한 양자역학을 검증한 실험이다. 사실 검증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실험 결과가 고전물리학으로는 해석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나왔지,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설명하기 어려우니 일단 영상을 보자.
간단히 설명하면, 두 줄로 틈이 나 있는 벽에 전자를 쏘았을 때, 다량으로 쏘면 파동처럼 운동하고, 하나씩 쏘면 입자처럼 운동하는데, 그 입자처럼 운동한 전자들의 패턴을 분석하면 또 파동처럼 운동한 모양이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찰자 효과’라고 해서, 전자의 운동을 아무런 간섭 없이 단지 ‘관측’만 하면 파동처럼 움직이던 전자가 갑자기 입자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실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거의 양파에게 칭찬을 해주면 양파가 잘 자라고 욕을 하면 양파가 썩는다는 낭설에 가까운 이야기다(‘칭찬 양파, 비난 양파’는 이미 유사과학으로 밝혀졌다).
전자가 관측자의 시선을 느끼면 갑자기 파동에서 입자처럼 운동한다니. ‘시선’이 파동이나 입자처럼 다른 물체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실재적인 무엇을 지니고 있다는 뜻인가. 심지어 관찰자 효과의 ‘시선’은 ‘사람의 시선’도 아니다. 백번 양보해 사람의 시선이야 ‘그의 시선을 느꼈다’라던지 ‘그의 눈빛은 벽도 뚫을 기세였다’ 같은 표현에서처럼 에너지가 있는 운동을 한다고 여길 만한 경험이라도 있지, 이중 슬릿 실험의 ‘관측자’는 그런 기운을 가진 생명체도 아니다. 차디찬 기계다. 그런데도 관측의 유무에 따라 전자는 행동 양식이 바뀐다. 몇 년 전 양자역학을 파다가 이쯤에서 묻어 놨다. 이후 철학에서도 양자역학을 배워서 머리로는 양자역학의 확률론은 고전물리학의 확률론과 다르며, 아예 기존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다 엎어버리고, 물체화된 입자가 아니라 확률과 파동으로 이루어진 완전히 다른 단위(아마 이것을 ‘양자’라고 할 것이다)를 기초로 다시 세계관을 정립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데까지 왔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대충 아는 것과 달리, 진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또다른 문제였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안다. 나는 ‘모순’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순이 무엇인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공존하는 상태다. 둘은 공존할 수 없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 있으면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으면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은 존재할 수 없다. 둘은 상호배타적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다고 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 죽지 않은 것이고, 죽었다면 살지 않은 것이다. 삶과 죽음은 상호배타적 개념이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전자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것은 모순이다. 입자와 파동은 상호배타적 개념이다. 입자가 파동성을 띤다는 것은 내가 만지고 있는 설탕 가루가 (마치 소리처럼) 3미터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에게도 동시에 만져진다는 것이다(이게 거시단위에서 가능하면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신적omnipresent 존재가 가능하다). 파동이 입자성을 띤다는 것은 소리가 나면 그 소리의 알갱이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순이다.
나는 왜 양자역학에 꽂혔는가? 나는 모순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묵혀놨던 양자역학이 다시금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나는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올랐다.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 하나의 대상 안에 상반된 ‘상태’가 공존하는 것. 고양이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삶과 죽음이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랑과 증오는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마음은 관찰되기 전까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마음은 어떤 타자와의 마주침, 즉 ‘사건’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마음은 결정되어 있는 걸까? 내 마음은 ‘사랑 60프로 증오 40프로’로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건이 들이닥쳐 마음을 열어보면 그렇다고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그 전까지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고 있다가 어떤 사건이 들이닥쳤을 때 그 마음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드러나는 걸까? 상자를 열기 전에 이미 고양이는 죽어 있었을까? 아니면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을까?
친구 중에 감수성이 좋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내 몸이 사라졌다>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 나우펠은 삶의 절망에 빠져 있는 남자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고, 피자배달을 하며 생계만 유지하다가 겨우 첫 사랑이 시작되나 싶더니 차이고, 기계에 손이 끼어 손이 절단되는 사고까지 겪는다. 어느 눈 오는 날 나우펠은 건물 옥상에서 건너편 멀리 크레인으로 뛴다. 첫사랑의 그녀 가브리엘과 그전에 어떤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운명을 믿어요? 진짜로요.”
“인생은 다 정해져 있고, 우린 그냥 따라갈 뿐이라고요?”
“그래요.”
“아무것도 못 바꾸고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죠. 우리가 아예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모를까. 확실히 마법을 걸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그게 뭔데요?”
“왜 있잖아요. 걸을 때 여기로 오는 척하며 농구할 때 속이는 동작처럼 딴 길로 새서 저 크레인으로 점프하는 거예요. 하면 안 되는, 뭔가 즉흥적인 일, 금지된 행동을 하는 거죠. 덕분에 다른 세상에 가서 잘됐다면 후회도 안 해요. 그런 거요.”
“그리고요? 드리블로 운명을 피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계속 피하는 거죠. 냅다 뛰는 거예요. 행운을 빌면서.”
눈이 오는 겨울날, 나우펠은 건물 옥상에서 건너편 크레인으로 뛴다. 그 순간 함께 영화를 보던 내 친구는 크레인에 발을 디디는 나우펠이 세 개로 보였다고 했다. 크레인에 안착한 나우펠, 건물에 발을 헛디딘 나우펠. 아니, 이렇게 명료하게 나눌 수 없겠지만, 마치 세 명의 나우펠이 건물에서 뛴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그런 것 아닐까? 이중슬릿의 전자도 그런 것 아닐까? 전자도 여러 명의 나우펠로 공존하다가, 벽에 부딪힌 순간(혹은 관측이 된 순간) 하나의 나우펠로 결정되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결정된 나우펠 이전에 공존하던 다른 나우펠들은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건가? 고전물리학에서는 그렇다. 결정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스승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혜원이의 아이는 이미 존재한다”고. 나의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아이는 ‘가능한’ 상태로 존재한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죽는다면, 나의 아이는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일까? “잠재성을 실재성으로 볼 것인가, 가능성으로 볼 것인가?” 어쩌면 양자역학의 쟁점은 이 질문에 함축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양자역학에 대해 다시 찾아보며 이중 슬릿 실험을 보았다.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이미지로 표현한 영상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아는 물리학에서 그런 움직임은 존재할 수 없다. 영상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파동처럼 두 틈을 동시에 통과하다가 벽에 닿는 순간 갑자기 입자로 결정되며, 그 결정되는 위치는 파동이 가장 밀도 높은(intense) 한 지점이라고 한다. 그 전자의 움직임을, 일반 물리학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그 움직임을 계속 돌려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응축!” 나는 벽에 닿았을 때 어느 지점에서 응축되는가? 나의 파동이 가장 센 지점에 응축된다. 그때 나는 비로소 입자로서 ‘관찰’된다.
마음도 그렇지 않나. 타자를 만나기 전, 마음은 어찌 결정될지 알 수 없다.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전까지는 마치 전자의 움직임처럼 모든 감정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동처럼 물결치던 전자가 벽에 닿으면 한 지점에 응축되는 것처럼, 타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내 마음도 한 곳에 응축된다. 응축되어 입자성을 띤 내 마음은 그때서야 관측 가능해진다. 파동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에 응축된 마음. 나라는 벽을 만났을 때,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증오로 응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까지 그 전자의 움직임은 사랑이기도 하고 증오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내가 너의 마음이 응결되는 벽이었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르겠다.
“혜원이는 아름다운 수학자가 되었지.”
작년에 스승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다. 분명 칭찬이었는데, 나는 그 칭찬이 좋지만은 않았다. ‘수학자’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철학을 배우고나서부터 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컴퓨터 같은 내가 싫었다. 자꾸 느끼라는데 어떻게 느끼는지도 모르겠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는 내가 비루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내가 수학자 같은 사람이란 걸 안다. 하지만 수학자가 싫었다.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화가나 음악가나 시인이나 뭐 그런 게 되고 싶었다. 아름다운 화가면 몰라도 아름다운 수학자라니. 대체 수학 오타쿠가 아닌 이상 누가 수학자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어. 그림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누가 수학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어. 지금도 그렇다. 마음을 양자역학으로 이해하려고 하다니. 나는 과학적인 내가 싫었다. 온 마음은 양자역학에 꽂혀 있는데, 그걸 이해하려고 하는 나도 비루했다. 그냥 느끼면 될 텐데 그걸 굳이 이해하겠다고. 그러면서 과학자들에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다. 세상을 명료하게 보고 싶은 마음. 과학의 동력은 그것이다. 명료하게 볼 수 있는 것을 애매한 채로 놔두는 것은 과학자의 마음이 아니다. 알고 싶었다. 모호해서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혼에 대해 글을 써도 안 나오는 눈물이 양자역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온다. 나는 아름다운 수학자가 아니다. 아름답고 싶은 수학자다. 모네의 그림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는 없어도, 오늘 전자의 움직임에서 아름다움을 봤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전자의 움직임이 벽에서 한 지점으로 갑자기 응결되는 그 움직임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움직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철학을 공부한 만큼, 아니 철학을 믿는 만큼, 그 일반물리학으로 말이 되지 않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모순의 세계에서 수학자로 사느라 힘들었나 보다.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을 보면. 이제 모순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싶다. 그간 복닥거렸던 마음은 한 ‘수학자’의 성장통이었나 보다.